어느푸른저녁

익숙한 고독과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

시월의숲 2012. 7. 6. 23:15

나이가 되었으니 결혼을 해야하지 않겠니? 그 전에 우선 사람이라도 만나서 사귀어 보는 것은 어때? 몇 번 만나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되는 것이고. 애당초 결혼을 하지 않을 것 같으면야 상관이 없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아. 네가 지금 전혀 어리지도 않지만, 지금처럼 늑장을 부리다가는 갑자기 폭삭 늙어버리고 말걸. 또 아이는 어떻고. 지금 네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보자, 네가 몇 살 때 네 아이가 대학교에 들어가는지 상상할 수 있겠니? 너는 계속 생각이 없다고만 하는데, 우리 몰래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는거니, 이성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거니?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인거니? 이도저도 아니라면 혹시 동성에 관심이 있는거야? 그래? 그것도 아니라면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네가 관심있는게 있기는 한거니? 말해 봐, 어서!

 

그는 왜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 보면 결혼을 못 시켜서 안달이 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홍수처럼 쏟아지는 말들을 면전에서 듣게되는 날에는 몸의 모든 기운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술을 마신 어느 저녁, 어두운 골목길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홀로 맞고 있을 때처럼 급격한 고독을 느꼈다. 그는 그 말을 들을때만큼 자신이 혼자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기에 가능한 관심과 애정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자신을 위한답시고 하는 그 모든 말들이 그에게는 가시방석보다도 불편하고 마치 목이 조여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왜 그런 것인가. 왜 그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기분을 느끼는가. 혹은 느낄 수밖에 없는가?

 

"사랑"

그는 사랑, 이라고 말했다.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사랑이야."

다들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뭐? 사랑? 결혼도 관심없다, 이성을 만나는 것도 관심없다는 애가 무슨 사랑이라는 거야? 농담하니?"

"이성에 관심이 없어도, 결혼에 관심이 없어도, 자식에 관심이 없어도 사랑에는 관심이 있을 수 있어. 이성에 관심이 있어야, 결혼에 관심이 있어야, 자식에 관심이 있어야 반드시 사랑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야. 그걸 모르겠니?"

"사랑을 해보지도 않고 사랑에 관심을 가지다니. 너는 머리로 사랑을 하려 하는구나. 사랑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사랑은 부딪쳐야 하는거야. 온 가슴으로, 온 몸으로!"

"그래, 그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는 결혼을 위해 사랑을 하지는 않겠어. 그게 내가 지금 너에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전부야. 그리고 사랑은 여전히 나의 커다란 화두야. 그건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니까. 그건 거의 기적이라 할 수 있어. 나는 그것의 정체가 궁금해. 넌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있겠니?"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그의 마지막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과 안타까움의 표정, 알듯말듯하다는 표정이 뒤섞여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술은 떨어졌고, 그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군가가 술을 더 시키기 전에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빠져나왔다. 밖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고, 택시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는데, 그곳은 그의 집과는 좀 떨어진 곳이었다. 택시에서 내리니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어둠이 자욱한 골목길에서 그는 익숙한듯 급격한 고독을 느꼈다. 여름의 시작이었으나, 그는 약간의 한기를 느끼며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우산을 쓴 그의 어깨 위로 빗물이 떨어져 그의 옷을 천천히 적셨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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