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4시의희망

The Fall

시월의숲 2012. 8. 22. 21:46

 

 

 

 

언젠가 내가 보고 들었던 것들의 이름을 나중에야 아는 경우가 있다. 보통 그것들은 내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준 것으로,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기어코(우연일지라도) 알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은 거창하게 말해 운명(그런 것이 있다면)처럼 다가온다. 우연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는 운명. 그것과 대면했을 때의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 어떤 충격보다도 강렬하게, 한 순간을 그것에만 집중하고 하게 하고 급기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알에서 깨어나게 한다.

 

처음 <The Fall>이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 그 후에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을 우연히 듣게 되었을 때가 그러했다. 이야기보다는 화려한 영상미에 정신을 빼았겼으나 결국 내게 남은 것은 영화의 전편을 타고 흐르던 음악이었다. 거대한 스케일의 영상미는 음악에 의해 더욱 그 폭이 넓어지고 아름다워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화면을 뚫고 나에게 전해지는 비장함, 슬픔, 알수 없는 환희, 숭고함 같은 것들이 나를 사로잡았고,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었던 것 같다. 그것은 정말 기적같은 일이라고밖에는 말하지 못하겠다. 나는 결코 클래식 마니아도 아니고, 그저 가끔씩 유투브나 들락거리며 첼로 연주나 바이올린 소나타 같은 것들을 찾아서 듣는, 그저그런 청자일 뿐인데. 베토벤이라면 운명 교향곡 정도밖에 모르는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그런데 무려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이라니!

 

시나리오만 좀 더 재미있었더라면 굉장히 멋진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베토벤 7번 교향곡을 만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The Fall>은 내게 무척 특별한 영화다. 호들갑스럽고, 허영으로 가득차며 감상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정말 그런 기분이 들었다. 침묵에서 깨어난 느낌, 각성된 순간의 느낌, 마침내 찾아내고야 말았다는 느낌, 그게 바로 너였다는 느낌, 그런 느낌이. 소설가 배수아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음악의 '재발견'이라고 해야할까? 너는 늘 거기에 그대로 있었으나 내가 새로이 그것을 발견하였노라, 고.

 

인간들이 향유하는 문화는 다양하고 거기서 체험할 수 있는 감정 또한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인간이 가장 인간이 아닐 수 있는 순간, 죄많고 나약한 인간임을 잠시 잊게 되는 순간, 내가 위대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운 어떤 것에 잠시나마 가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순간은 바로 클래식을 듣고 있는 순간임을.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가 주는 아름다운 영상이 없었다면 나는 그것의 이름을 더 나중에야 알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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