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

시월의숲 2012. 8. 28. 19:56

그것은 살아있는 짐승과도 같이 성장하거나 소멸한다. 그것은 또한 밤이되면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야성의 눈을 번뜩인다. 어둠은 그것의 본능을 드러내는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그것의 숨은 더욱 거칠어지고, 이빨은 더욱 날카로워지며, 눈은 더욱 빛을 발한다.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은 그렇게 세상을 지배한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하거나 자유를 억압하고 철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침묵하게 하여 들리지 않는 것을 듣게 하고, 아름다운 빛으로 우리의 눈을 적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여 결국 스스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듦으로써.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 천 개라는 숫자는 그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하찮고, 누군가의 이해를 필요로 하며 결과적으로 상상력이 희박한 동물임을 드러내는 지표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하얗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 한 번이라도 그 빛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그 이후의 삶은 분명 그 전의 삶과는 다른 것이 되었음을 스스로 느끼게 되리라. 김연수의 <원더보이>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그곳의 밤하늘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처럼 아름답지'라고 주인공의 아버지가 말했던가. 이 글은 어쩌면 <원더보이>의 또다른 감상문이 될지도 모르겠다. 혹은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이라는 은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자의 그저그런 감상문이 되거나. 만약 내가 소설가나 시인이라면 '천 개의 눈을 가진 짐승'이라는 제목의 아름답고 시적이며 생명력으로 가득찬 글을 쓰리라. 그리고는 부끄러움에 이내 그것을 태워버리고 말겠지. 왜냐하면 그 말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것과 같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