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그는 어디로 굴러가는지 모르는 속이 빈 커다란 드럼통을 왜 그리도 요란하게 굴렸을까

시월의숲 2012. 8. 30. 23:54

1.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라는 책의 감상문을 쓰려다 포기하고 말았다. 아래는 내가 쓰다가 만 것이다.

 

 

2.

물질적으로 풍요하여 양질의 고급문화를 향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객관적으로 측정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굳이 측정하려 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가지지 못하고, 접해보지 못하며, 느껴보지 못한 것들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작아지고, 어색해지며, 머뭇거리게 됨을. 시트콤에 등장해서 씁쓸한 웃음을 주었던, 발사믹 소스를 간장이라고 말하던 등장인물의 경우는 아주 가벼운 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약간의 노력으로 커버가 가능하기에 웃어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어렸을 때부터 학습된 것이거나 환경에 의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 내면에 차곡차곡 쌓인 경우, 그 차이는 훨씬 커지고 깊어진다. 어떤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노출과 반복성이 그러한 차이를 가져오는 핵심요소가 된다.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만을 어느정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거나,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변명 혹은 안타까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일때가 많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타인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며 살아가고 그러한 비교는 각자가 처한 환경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열등감 혹은 우월감에 빠지게 한다. 돈의 있고 없음은 그러한 격차를 더 크게 만든다. 하지만 종교의 경우는 어떨까? 예를 들어 어렸을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와 무신론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의 경우 말이다.

 

믿음에 대한 확신으로 가듣 찬 환경에서 자라난 경우, 우리는 신 혹은 성스러운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접근하게 되고 믿음또한 자연스레 형성되는 반면,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자라난 경우 우리는 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거부감을 갖게 되며 종교에 대한 어떤 편견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많아진다. 종교는 그것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간의 차이가 단순히 우리가 어떤 문화에 대해 가지는 세련됨이나 우아함을 결정짓는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종교인은 고리타분하고 구닥다리며 지극히 선한 얼굴로 불신지옥을 부르짖는 폭력집단으로 보이며 무신론자가 오히려 이성의 세례를 받은 지성인으로서 똑똑하고 세련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신앙인은 신앙인대로 무신론자는 무신론자대로 그럴듯한 자기 변명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를 공격하는데 쓰는 적절한 반론을 가지고 있다. 그 모든 것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으며 어느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예전에는 모든 사람이 당연히 신앙생활을 해야했지만 지금은 종교를 가지지 않아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는다. 종교는 이제 선택의 문제(물론 종교인이라면 생각이 다르겠지만)가 되었고,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오히려 일부 비상식적인 종교인들로 인해 종교가 공격받는 시대가 되었다고 해야할까? 인간의 위상은 올라갔고 종교의 위상은 예전의 명성을 누리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는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된지가 이미 오래전이지만 종교인들의 숫자는 줄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알랭 드 보통의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종교에서 우리(무신론자)가 배울점이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고 몇 가지 유용한 팁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가 말한 것들이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기란 아마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3.

문장이 물흐르듯 쓰여지지 않고, 중언부언하며, 쉼표가 많아지고 글이 길어지는 것은 분명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른다는 뜻일 게다. 한마디로 생각이 정리가 안된다는 것. 또한 그 생각이란 것의 깊이가 굉장히 얕다는 것. 그건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과 같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건 내 얄팍한 지식과 허황된 감상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 얼마나 낯뜨거운 일인가!

 

짧고 간결하며 압축적인 글을 쓰고 싶다.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의 핵심을 명확히 꿰뚫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아직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하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심지어 내가 처음에 쓰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조차 생각나지 않을때가 많다.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 내겐 중요한 과제인 것 같다.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것도.

 

 

4.

그래서 결국 이렇게 괴상한 글이 되고 말았지만.

 

 

* 제목은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 지성사, 2003)에 실린 <무신론자>라는 시에서 발췌하여 변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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