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빗소리를 듣다

시월의숲 2012. 8. 13. 00:26

빗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타닥타닥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방안 가득 울린. 오늘은 일요일이지. 나는 한숨을 돌리며 다시 잠을 청한다. 비가 와서인지 기온이 좀 내려간듯 하다. 배만 살짝 덮고 잤던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린다. 일주일만에 또 고향에 내려왔다. 방안 가득 울리던 빗소리에 익숙해지면서 살포시 잠이 들었던가? 그걸 잠이라고 해야할지, 자면서 꾼 꿈이라고 해야할지, 그저 잠깐의 추억 혹은 착각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어서 일어나서 밥을 해야할텐데. 너무 늦게자면 할아버지가 화를 낼거야. 오랜만에 집에 와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도 하지 않고 늦잠만 자고 있다니. 어제 보니까 집에 먹을게 아무것도 없던데 어떻하나. 어서 일어나 할아버지의 아침을 차려드리고 늘 그랬듯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를 마셔야 할텐데. 할아버지에게는 커피를, 나는 녹차를. 그러면 할아버지는 녹차를 도대체 무슨 맛으로 마시느냐고 물어보겠지. 나는 매번 똑같은 톤으로 녹차가 몸에 좋으니 이제부터 할아버지도 커피는 그만 마시고 녹차를 마셔보라고, 자꾸 마셔보면 그 맛을 알거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할아버지는 오래되어 때가 낀 카셋트 플레이어를 켜고 노래를 듣기 시작하겠지.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그 노래. 나는 제목도 모르면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그 노래들을. 나는 시계를 보고 버스의 시간을 확인한 다음 할아버지에게 이제 가야 한다고 말한다. 할아버지는 그래, 그래, 직장 생활 잘 하고, 힘들어도 참고, 밥 잘 챙겨먹고, 차 조심하고, 가서 전화하라고 말한다. 나는 네, 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술 많이 드시지 말고, 밥 꼭 챙겨드세요, 라고 말하며 대문을 나선다. 골목을 걸어나오면서 나는 뒤를 돌아본다. 거기, 문 앞에 할아버지가 서 있다. 나는 손을 흔든다. 할아버지도 손을 흔든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짓는다. 할아버지. 이제 영영 손을 흔들 수 없게 되었어요. 미소 지을 수 없게 되었어요. 더이상 할아버지를 볼 수 없게 되었어요. 이상하죠.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나에게 했던 수많은 모진 말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일상적인 하루의 반나절은 왜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건가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인간은 이상할 정도로 늘, 어쩔 수 없는 슬픔을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는 걸 이미 알고 계셨던 건가요. 그래서 그렇게 항상 술을 드셨던 건가요. 이제는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왜...

 

눈을 뜬다. 이것은 꿈인가? 그저 잠깐의 추억 혹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먹구름같은 슬픔이 천천히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몸을 일으킨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오래지 않은 과거의 어느 날에도 비가 왔던 것처럼. 나는 가만히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빗소리를 듣고 또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