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이진경,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휴머니스트, 2011.

시월의숲 2012. 11. 20. 22:26

불온성의 감정은 기대한 행동이나 반응에서 벗어나는 이탈로 인해, 당연히 예상했던 궤적의 어떤 교란에서 발생한다. 우리의 사고나 행동을 규제하는 '정상적' 분할의 선들을 횡단하며 밀고 들어오는 침범에서, 그 앞에서 느끼는 당혹에서 온다.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다른 한편 불온성은 그렇게 밀고 들어온 것에 휘감겨 뜻밖의 곳, 알수 없는 어딘가, 가고 싶지 않았던 어딘가로 말려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에서 온다. 저 멀리 있다고 느끼던 어떤 것이 덮쳐와 나를 잠식하고 시뻘건 바다로 침몰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감에서 온다. 전자가 보이지 않던 것, 구석으로 제쳐두었던 것이 난데없이 불쑥 튀어나오는 현재적 출현에 의해 발생한다면, 후자는 그것이 침범하며 흩어놓은 선들이 나를 휘감아 더러운 물속에 잠기게 할 것 같은, 미래 시제를 갖는 어떤 예감에 의해 야기된다. 현재적 출현에서 오는 당혹, 도래할지 모르는 침수의 불안한 예감, 이 두가지 상이한 감정의 복합체를 불온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27~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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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자들,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고 우리의 경계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들이야말로 이런 세속적 각성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합일'의 엑스터시를 통하지 않고서도 감각적 각성에 이르는 길, 그리하여 지금 보이는 것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 혹은 존재자에 가려 보이지 않던 존재를 보는 감각적 각성의 길이, 불온한 자들을 통해 가능하리라고 말할 수있을 것이다.(38~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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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장애자다. 모든 존재자는 항상―이미 다른 수많은 존재자에 기대어 그것들에 '폐를 끼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장애자다. 무언가에 기대어 존재하는 것이 모든 존재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모든 존재자는 운명적으로 장애자들이다. 이 경우 장애는 존재 그 자체와 결부된 것이란 점에서 존재론적 장애다. 이런 점에서 모든 존재자는 '동등하다'. 즉 존재론적 장애자라는 점에서 동등하게 '하나'로 묶일 수 있다. 장애자는 이런 기대어 있음을 통해 모든 존재자를 하나로 묶는 하나의'범주'다. 장애자란 이렇게 하나로 묶인 모든 존재자를 지칭한다. 장애자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존재론적 일반성'에 도달한다.(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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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란 문턱을 제거하려는 집합적 운동이다.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연이어지는 문턱의 체계를, 문턱을 따라 패인 홈을 제거하기 위한 집합적 실험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장착된 문턱의 체계를 해체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매끄러운 공간'을 창출하기 우한 집합적 시도다. 고고학자들이 말하는 강한 의미에서 생산력의 혁명이 자연의 문턱을 없애려는 시도였다면, 맑스가 말하는 생산양식의 혁명이란 사적 소유라는 문턱, 계급이라는 문턱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 등의 형상으로 표상되는 성의 혁명이란, 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간 사이의 문턱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그 문턱을 넘어 자유로이 이동하고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매끄러운 공간을 만들려는 시도라고 할 수있을 것이다. 교육혁명, 그런 것이 정의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장착된 학력이나 학벌 같은 것, 혹은 '전문가'라는 이름의 관리들로 작동하여 영토와 영역을 분할하는 문턱을 제거하여 사유와 활동이 자유로이 흐르고 자유롭게 만나게 하려는 집합적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1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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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사이보그, 그것은 처음으로 도구를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었던 원시인이다. 도구를 손에 들고 움직이는 인간, 그것은 기계와 유기체가 결합해 하나처럼 작동한 최초의 사이보그였다.…… '기계'와 '도구'를 구별함으로써 첫 번째 사이보그의 자리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포기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 사람이 보여주었듯이 도구와 기계를 구별해주는 뚜렷한 경계선은 없기 때문이다.(180~1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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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매혹되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아무리 감정을 고양하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은 상승과 고양의 운동이 아니라 하강과 침몰의 운동을 야기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고상해지거나 지고해지는 게 아니라 지고함을 떠나 기꺼이 어디든 내려가는 것이고, 준비가 충분히 안 된 상태에서 물에 빠지는 것이며, 타락하고 오염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종종 목숨마저 거는 위험을. 그냥은 결코 지지 않았을 짐을 지는 것이다. 제정신이라면 결코 치르지 않았을 비싼 대가를 치르는 변용이다. 따라서 사랑에 '지고함'이나 강도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는지가 아니라 자신을 얼마나 낮출 수 있는지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은 '자아'를 찾는 여정이 아니라, 자아를 떠나 뜻하지 않은 곳으로 가는 여행이다. 매혹의 강도, 사랑의 강도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그 거리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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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결국은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짝짓기로, 암컷과 수컷으로, 그것들의 짝짓기로 귀결되지 않는가? 거기서 벗어나는 개체화란 극히 적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가? 아마도 수정으로 귀착되는 교접의 사건만 주목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정에서 독립된 성욕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인간의 '본성'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인간적인 것 중 하나가 수정과 무관한 성욕, 수정과 무관한 사랑의 행위 아니던가!) 동물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갖지 않는다. 성적 행위는 단지 수정이라는 목적에 귀착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렇지만 수정이라는 목적을 떠날 줄 모르는 목적론적 사고는 모든 사랑의 행위를 '결국은 2개의 성'으로 불할하고 이성애로 귀착시킨다. 생식 내지 수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결론처럼 보일 것이다.……그러나 에르퀼린 바르뱅의 사례처럼 양성의 생식기관을 모두 갖고 있었기에 남녀 중 어느 하나의 젠더로도 동일화될 수 없었던 사람의 신체, 젖샘과 음경을 모두 지닌 '중간적' 신체, 혹은 반대 성의 유전자를 가진 여성이나 남성에게서 성은 인간의 젠더적 이항성으로 수많은 분자적 성을, 다양한 중간적 성을 포개려는 시도들에 대한 생물학적 물질성의 저항을 뜻하는게 아닐까?(2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