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휴가라면 휴가

시월의숲 2013. 8. 17. 21:58

휴가라면 휴가를 보내고 있다. 휴가면 휴가지, 휴가라면 휴가란 또 뭔가. 15일부터 쉬기 시작해서 어제, 오늘까지 쉬었다.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일터에 나가야 한다. 그래도 3일을 쉬었으니 휴가라면 휴가라고 할 수 있겠다. 휴가라는 것이 반드시 어딘가를 가야만 하는게 아니라면 말이다. 날씨가 무척 더워서 어딘가로 움직일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더위에 어딘가를 가야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인 것이다. 더위를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냉방이 잘 된 카페에 가서 시원한 차나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게 최고인 것 같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겠지만 그건 생각보다 빨리 끝나니까 좀 아쉬운 면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정작 오늘을 포함하여 지난 3일 동안 내가 한 일이라곤 낮 2시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 간단한 밥을 챙겨먹고 선풍기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책을 읽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실증이 나면 한 달 전에 배우기 시작한 우쿨렐레를 한 두 시간 가지고 놀고, 인터넷을 하고 텔레비전을 봤다. 창 밖의 태양은 '너를 반드시 태워죽이리라'는 기세로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있는 사택도 덥긴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나가 저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어딘가로 가고자 하는 욕망은 털끝만큼도 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배가 고파올때면 텅 빈 냉장고를 보고 좀 난감한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더우니까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요리도, 산책도, 사람을 만나는 일도.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언젠가 친구 집에 갔다가 빌려온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이란 소설이 내게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 빌려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다 읽고 이젠 무얼 읽을까 고민하며 책을 뒤적이다가 쌓여있는 책 가장 아래쪽에 받침대처럼 끼여있는 책을 발견했다. 이거다, 싶은 마음에 소설을 읽기 시작해서 이틀만에 다 읽었다. 내가 소설을 이렇게 빨리 읽는 건 정말 드문 일인데, 그만큼 이 소설은 재미있고, 그래서 더위를 다소나마 잊을 수 있었다. 장르소설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계절과 기분에 따라서 장르소설을 읽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인 것 같다. 특히 더위에 추리소설을 읽는 건 꽤 좋은 피서법인 것 같다. 물론 그게 재미있을 경우에 한하지만 말이다.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이라고 하는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은 일본의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하면서 실은 사형제도의 맹점을 실날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4장의 내용은 읽는 속도가 좀 떨어지간 했으나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이 담긴 중요한 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긴장감을 잃지 않고 현실 비판적인 내용을 잘 결합한 꽤 재밌는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고 나니 휴가가 거의 다 가버렸다. 뭐, 생각해보니 이런 휴가도 나쁘지 않다. 아,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지금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 같다. 휴가라도 밥은 제대로 먹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텅 빈 냉장고를 다시 한 번 더 열어본다. 뭐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도저도 없으면 저번에 사다놓은 비빔면이나 먹어야겠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 오늘은 평소보다 좀 일찍 자야 할 것이다. 휴가도 끝이고, 이제 여름도 끝이겠구나. 태양이, 조금만 힘을 빼주면 좋으련만. 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는 건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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