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문학과지성사, 2001.

시월의숲 2013. 11. 4. 23:44

모든 강물은 끊임없이 바다로 휩쓸려 들어간다. 나의 삶은 침묵으로 흘러든다. 연기가 하늘로 빨려들 듯 모든 나이는 과거로 흡수된다.(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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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열정에는 진저리쳐지는 포만의 정점이 있다.

이 시점에 이르면 우리는 문득 우리의 삶을 지탱시키는 이 열기를 증가시킬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혹은 열기를 지속시킬 수조차 없어서 그것이 곧 소멸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에게 닥칠 불행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혀서뿐만 아니라 운명을 변경시키거나 지연시켜보려는 희망 때문에, 우리는 그 예방책으로 미리, 갑작스럽게, 은밀히, 길모퉁이에서, 서둘러 눈물을 흘린다.(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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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 한 번만 사랑한다. 그리고 이 단 한 번의 사랑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13~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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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것은 강렬한 쾌락이다. 배우는 것은 태어나는 것에 속한다. 몇 살을 먹었든 간에 배우는 자의 육체는 그때 일종의 확장을 체험한다.(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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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관련되지 않은 도전들이 갑자기 우연에 의해 추구하지 않았던 결과에 속하게 된다. 그게 배운다는 것이다. 장벽이 무너지고 장벽이 무너졌으므로 간격이 사라진다. 그게 배운다는 것이다. 숲이 어둠에서 벗어난다. 여행의 노정이 연장된다.

배울 때 기쁨을 느끼지 않는 자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무언가 다른 것에 열중하는 것, 사랑하는 것, 배우는 것, 그것은 같은 것이다.(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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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되어야 하는 것은, 악보의 음표나 작품의 정신이 아니라 작곡가의 영혼을 움켜쥐고 있던 힘, 그 발굴되어야만 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발굴하기란 되풀이가 아니다. 발굴이란 파괴하는 것이다. 예술은 항상 파괴한다. 선사학자는 우물이나 무덤을 발굴할 때, 자신이 밝은 곳으로 끌어낸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분해한다.(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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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텍스트는 발음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문학이다. 아름다운 악보는 연주되기도 전에 들린다. 그것이 미리 준비된 서양 음악의 찬란함이다. 음악의 원천은 소리의 생산에 있지 않다. 그것은 듣기라는 절대 행위 안에 있다. 창조 행위에서 이 절대 행위는 소리의 생산에 선행한다. 작곡이라는 행위가 이미 그것을 듣고, 그것으로 작곡을 한다. 연주가 이미 들은 것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듣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을 솟아오르게 한다. 그것은 의미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내기도 아니다.

그것은 순수한 듣기이다.(60~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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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정확히 이런 것이다 : 은밀한 생, 분리된 성스러운 삶,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 그것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된 삶인 이유는, 그러한 삶이 가족보다 먼저, 사회보다 먼저, 빛보다 먼저, 언어보다 먼저, 삶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어둠 속, 목소리도 없는, 출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태생(胎生)의 삶.(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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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사랑의 상실을 위로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은 무자비한 증여품이다. 사랑은 잃어버린 것과 연관된다 :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상실이 사랑을 입증한다.(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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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여덟 가지가 사랑의 증거이다: 심장, 말을 안 듣는 사지, 나른해진 몸뚱어리, 굳어진 혀, 수척한 모습, 눈물, 비밀, 홀로 타오르는 육체의 정염, 이러한 것들이 정열적인 사랑의 여덟 가지 증거이다.

다음 여덟 가지가 사랑의 결과이다. 사랑은 심장을 빨리 뛰게 하고, 고통을 진정시키고, 죽음을 떼어놓고, 사랑과 관련되지 않는 관계들을 해체하고, 낮을 증가시키고, 밤을 단축시키며, 영혼을 대담하게 만들고, 태양을 빛나게 한다. 이러한 것들은 정열적인 사랑을 효과이다.(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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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영혼을 놀라게 한다. 책읽기는 자신의 내부에 등록된 모국어, 그곳에서 속삭여지며 의식의 형태로 감시하는 반향 효과를 흐트러뜨린다. 책읽기는 사고의 시공을 확장한다.(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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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고 있다는 기이한 느낌, 갑자기 문지방을 넘어선 느낌, 내 삶의 입구가 갑자기 현기증을 일으키는 느낌, 언어의 획득과 관련된 더 거칠고, 더 날것이고, 더 명철하고, 더 깊고, 더 생생한 경험의 느낌을 나는 자주 맛보았다. 삶이 아닌 것, 어리석음과 슬픔, 암울한 혼란, 이런 것들의 한 시대가 마치 허물처럼 떨어지는 느낌이다. 페이지들은 갑자스럽게 열린 창의 문짝들이다. 칩거 후에 동굴에서 나올 때의 느낌, 혹은 불확실한 시기의 언저리, 대여섯 살의 유년기로 잠수했다가 나올 때의 느낌,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변한다. 삶 전체가 갑자기 어조가 달라지면서 변모한다. 반향의 효과가 두개골 속으로 들어가고, 그 안에 자리잡는다. 의식 자체는, 의식이 전제되는 자율성 안에서 아무리 타산적이고 의심스럽다 할지라도, 의식하고 있다는 인상 혹은 오히려 분할한다는, 반향한다는 인상은 강렬한 쾌감이다. 그것은 제2의 태어남의 느낌, 부활의 느낌이다. 입문자의 기쁨이다. 동화의 주인공의 기쁨이다.(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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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아버지의 어렴풋한 기억이다. 닮은 이미지들의 생산, 그것은 성교다. 어린애들은 아버지의 살아 있는 이미지들이다. 본질을 공유하는, 동형의, 동명 이인의, 찍어낸 듯 닮은 모습들. 모든 자식들에게는 단 하나의 성(姓)이 있을 뿐이다. 아버지가 될 연인은 화가이며, 그가 사용하는 유일한 물감은, 자연계의 여명기와 범해(凡海)의 최초의 생명의 물결 이래로, 모든 선조들의 육체에서 육체로 전해지는 희멀건 정액이다.(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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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에 관해서, 귀는 음악을 가지고 있다. 눈은 회화를 가진다. 죽음은 과거를 가진다. 사랑은 타인의 벌거벗은 육체를 가진다. 문학은 침묵으로 환원된 개인의 언어를 가진다.(2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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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기도 전에 맨 처음 보는 것, 우리 자신이 되기도 전에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 느껴지기도 전에, 그리고 자신을 바라볼 생각을 할 수 있기도 전에 존재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태어나고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어머니라고 부른다.(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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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땅에서 솟아오른 기이한 머리이고 강은 산이 흘린 눈물이다.

사슴은 산의 슬픔에서 갈증을 푼다.

근원에서 흘러나와 끊임없이 어딘가로 사라지는 물줄기를 거슬러 연어들이 올라온다.

지속적으로 흘러내려 원천에서 상실된 물을 바다라고 부른다. 나는 바다를 상실된 것의 집합이라고 정의한다.(3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