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젊음, 너무나 많은 시작이 있었으므로 끝이란 것은 좀처럼 가늠이 안 되는 것이었고 또 아름답게만 생각되었다. 서서히 몰락해가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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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엔가 우리가 충분히 저항력이 떨어지고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 불치의 병이 되어 터져 나온다. 그러나 또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이 죄수처럼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사랑이 해방되어 우리들 자신인 감옥을 부수고 나오는 데 성공하는 일은 가끔씩 일어난다. 사랑이 감옥을 부수고 나온 종신형 죄수라고 상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자유의 순간들에 사랑이 왜 그렇게 미쳐 날뛰는 것인지, 왜 그렇게 무자비하게 우리를 괴롭히고 온갖 약속 안으로 우리를 밀어넣었다가 곧바로 온갖 불행 안으로 몰아넣는 것인지를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우리가 사랑을 내버려두기만 하면 사랑이 무엇을 줄 수 있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사랑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벌을 받아 마땅한지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말이다.(2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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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을 기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도 그랬다. 물론, 우리가 똑같은 노래를 알고 있거나 서로 다른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기적은 아니었다. 비록 우리가 부르는 밤의 노래들이 서로에게 인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멋진 방식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진정한 기적은 우리의 몸이었다. 프란츠가 처음 손등으로 내 뺨을 쓸어내린 이후로 우리의 몸이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로서는 사실 몸이 없다면 진정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우리의 경우에 육신이 독단적인 행위자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마치 그것을 사람들이 평생 억지로 갈라놓았던 것처럼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서로 뒤엉키게 되었을 때 마치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듯, 마치 서로를 찾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었다는 듯, 그리고 이 숙명을 놓칠 위험을 항상 의식하고 있다는 듯, 기진맥직한 지고의 기쁨이 우리의 몸 위에 찾아왔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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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에 대한 내 감정의 억제할 수 없는 성질이 공룡성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사랑했던 것이 내 안에 있는 공룡성, 원시적인 어떤 것, 격세유전의 폭력성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던 것이다. 언어를 필요료 하는 어떤 것도 프란츠에 대한 내 사랑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었다.(107~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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