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시의 문제가 아니라 추억의 문제

시월의숲 2013. 11. 17. 17:52

내가 그 시인의 이름을 알았던 건 아마도 초등학교 5, 6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고모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고모는 종종 내게 서점에 가서 책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그렇게 산 책 중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지금 집에 있는 10권의 태백산맥 중에 절반은 내가 심부름으로 사온 것일 게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꽤 잘나갔던 동네 서점에 들어가 태백산맥 5권 주세요, 라고 쭈뼛거리며 말한다. 그러면 서점 주인은 책장에서 태백산맥을 꺼내 계산대 옆에서 책을 종이로 싸기 시작한다. 그때만 해도 책 표지를 종이로 싸주던 시절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서서 서점 주인이 책을 정성 들여 싸는 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짧다면 짧은 그 시간이 좋았다. 책이란 소중히 다뤄야만 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포장된 책은, 속에 책갈피를 품은 채 누런 봉투에 넣어져 내 손에 전달되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 고모에게 전해 주었다. 고모가 책을 다 읽으면 그다음엔 할아버지가 읽었다. 책표지가 종이로 싸였기 때문에 안을 펼쳐보지 않으면 무슨 책인지 몰랐으므로, 할아버지는 책등에다가 책의 제목을 멋들어진 필체로 써놓으셨다. 그렇게 고모 방에는 할아버지의 필체로 쓰인 책들이 책장 가득 꽂히게 되었다. 책을 찾기 위해서는 책장을 봐야했고, 책장을 보면 제일 먼저 할아버지가 쓴 책의 제목이 보였다. 나는 그렇게 종이 위에 쓰인 책의 제목만을 보고 무슨 책일까 상상하게 되었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 책의 완성은 출판 혹은 독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할아버지가 책의 목을 쓰는 것으로 완성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런 것 같다.

 

아, 내가 처음 이름을 알았던 시인에 대해서 말하려 했는데, 이야기가 옆으로 새어 버렸다. 고모의 심부름으로 산 책 속에는 책깔피가 몇 개 들어 있었는데, 거기 그 시인이 쓴 시의 일부분이 감상적인 그림을 배경으로 적혀 있었다. <홀로서기>시리즈의 일부분이었는데, 그때 내가 초등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구가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 생각이 그 시인의 시집을 사는데까지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홀로서기>라는 제목과 시인의 이름은 확실히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름조차 얼마나 서정적이었던지. 이후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내가 조금 컸을 때 나는 그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샀다. '절망'이니 '황홀' 뭐 이런 단어들이 들어간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고향 집 내 방의 책장에 꽂혀 있을 것이다. 그 시인을 생각하면 나는 내 유년 시절이 떠오른다. 고모와 함께했던 날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아직은 살아계셨을 때의 날들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그 시인에 관한 불미스러운 기사를 읽었다. 과거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시인이었기에, 나처럼 누군가의 마음속에 많든 적든 추억으로 남아있을 시인이었기에 충격이 컸다. 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그의 시가 문학적으로 높이 평가받을만한 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가 쓴 시가 곧 그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어쩐지 내 추억의 한 부분이 훼손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 이건 시의 문제가 아니라 추억의 문제이다. 이건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일까? 시는 시일뿐, 시와 시인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윤리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해서 다른 이들보다 더 윤리적일 거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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