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2010.

시월의숲 2013. 12. 18. 00:54

 

 소설을 집어 들었을 때, 언젠가 한 번 읽었던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너무나 유명해서 제목만 보고서도 마치 그 소설을 다 읽은 것 같은 느낌이 아니라, 좀 더 확실한 실체가 있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오래 전에 읽어서 세세한 줄거리는 생각나지 않지만, 읽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는 느낌. 실은 그 반대의 경우가 더 흔할 터인데, 읽어놓고도 까맣게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거나, 심지어는 내가 그것을 읽었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는 경우 말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읽었다는 느낌이 확실해서인지, 처음 읽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로 읽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 읽고나서야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나는 과거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지 않았다. 읽지도 않고 어떻게 그것을 읽었다는 느낌이 이렇게나 강한 것인지 신기할 지경이다. 내 이런 강렬한 착각은 아마도 <위대한 개츠비>를 읽기 전에, <위대한 개츠비>에 '관한' 글 혹은 소설 이외의 것들을 을 더 많이 읽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그렇듯, 독특한 감흥 속에서 읽은 <위대한 개츠비>는 과연 '위대한' 개츠비에 관한 이야기였다. 작가가 이 소설의 제목을 놓고 꽤 고민했다고 하는데, 만약 다른 제목으로 이 소설을 출간했다면 지금과 같은 대접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만큼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은 이 소설의 거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개츠비라는 한 인간의 몰락이 왜 위대한가에 대한 고민이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반어적 표현인가?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의 표현인가? 반어적이라면 왜 위대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라면 왜 위대할 수밖에 없는가? 개츠비의 흥망의 역사가 1920년대 미국 사회에서만 한정되고 통용되는 것이라면 이 소설이 지금까지 읽힐 수 있었을까? 진부하다면 진부한 이런 물음들을 나또한 떠올렸고, 생각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대를 그리고 있지만, 시대를 떠나 인간의 속성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작품을 흔히 명작이라고 일컫는다면 이 소설은 분명 명작이고, 고전이다. 아니다. 그보다는 이 말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소설은 인간의 추악한 속성만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의지' 또한 드러내보였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이 될 수 있었다, 고. 그 '의지'와 '신념'이라는 것이 비록 불꽃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같은 것일지라도 말이다. 한갖 신기루같은 사랑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개츠비의 그 의지와 정신을 어찌 위대하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나 역시 소설 속 화자인 닉이 한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래,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