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 뿔, 2010.

시월의숲 2014. 1. 24. 00:07

 



나는 어떤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집어 들었던 것일까?

 

우리시대의 체호프라는 극찬에 끌려서일까? 사실 나는 '우리시대의 체호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은가! 저자에 대한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단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이 책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읽어보지 못했을, 앨리스 먼로라는 생소한 작가의 작품집을 말이다. 왜 이 소설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내용의 소설이길래?

 

소설을 다 읽고나서 내가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스스로 되물었다. 나는 어쩌면 엄청난 반전이나 기묘한 상황설정, 독특한 문체나 서사구조같은 기발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 같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그와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총 15편의 단편소설 중 맨처음 실려있는 <작업실>이라는 소설까지는 그런 기대감이 사그러들지 않았으나, 소설을 한 편씩 읽어나가면서 점차 내 기대와는 다른 종류의 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의 작가임에도 마치 국내작가의 글처럼 이질감이 없었다. 공간적인 배경이 우리나라 6~70년대(?)의 시골과 비슷했다. 현대화가 시작되기 전 혹은 막 시작되려는 찰나의 소도시 혹은 시골에서 겪는 가족, 친구, 남자와 여자, 아들과 딸, 성인과 미성년,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이 작가의 섬세하고도 유려한 필체로 그려진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지나간 어느 한 시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수치스러웠던 일이나 돌이킬 수 없는 일, 놓쳐버린 일들이 생각나 가슴 한켠이 아련히 아파오기도 한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 세계에 특별한 인간은 나오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의 죽음, 이별, 사랑, 믿음, 의지같은 것들이 미묘한 감정의 선을 따라 그려질 뿐이다. 단편들이므로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있지는 않지만, 읽고나면 오랜 여운이 남는다. 책 마지막에 실려있는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등장하는 마샬레스 선생님처럼 인간에 대한 우직한 신념이랄까, 어떤 긍정의 기운이 소설 가득 넘쳐흐른다. 그런 면에서 <작업실>은 이 소설집에서 가장 동떨어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또한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잘 나타낸 소설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책을 다 읽고나니 내가 처음에 했던 기대와는 다른 기대가 생긴다. 어쩌면 내가 이 작가의 다른 소설집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별거 없어보이지만 그 안에 어떤 격렬함을 품고 있는 소설이다. 하품만 나는 하루하루지만 한 번 삐끗하는 순간 지옥으로도 천국으로도 변하는 것이 일상이라는 괴물이 아니던가. 그렇듯 한 번 '삐끗하는 순간'이 앨리스 먼로의 소설에는 있다. 무심한듯, 아주 은밀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