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자음과모음, 2013.

시월의숲 2013. 7. 18. 00:11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너무나 고립되어버리지 않을까요? 단 한 사람도 설득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하고, 또한 그 누구도 우리의 무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혼자서 고개를 돌리고 아주 멀리 가버려야 한다는 의미잖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는 채 말이죠. 우리는 평생 동안 황야에서 양들과 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별들은 죽고 다시 태어나고, 양들도 마찬가지겠죠. 그러면 당신은 세상은 변함이 없노라고 말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슬픈 자의식조차도 마침내 느끼지 않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 고독해요, 아야미."

"그렇다면 고독하기 때문에 타인을 설득해야 한단 말인가요?"

"왜냐하면 고독은 실패이기 때문이죠."

 

우리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타인을 설득해야만 하는가? 고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여 마침내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고독에 빠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은 결국 더 깊은 고독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했던 수많은 시도는 결국 더 큰 실패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이 아닐까? 고독이란 늪, 혹은 깊은 잠과 같아서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고, 설사 아주 사랑하는 두 명의 연인이 가까이 살을 맞대고 있다 하더라도 고독은 그 살과 살이 맞닿은 틈새로 불길하게 피어오르고, 급기야는 서로의 심장 속 연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저 깊은 곳에서 마치 나병처럼 번져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극히 운 좋게 누릴 수 있는 예외적인 현상일 뿐이고, 대부분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실패일 뿐. 어쩌면 우리는 무한히 되풀이 되는 실패의 쳇바퀴 속에 있으며, 어쩌면 인간이라는 것은 실패의 무덤으로 이루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면, 고독이란 인간이 유전자처럼 제 몸속에 지니고 다녀야 하는 달팽이 집 같은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고독하기 때문에 타인을 설득해야 한다는 말 따윈 해서는 안 된다. 타인을 설득하려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고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 그는 누구보다 고립을 찬미했다. 타인에 의한 고립이 아니라 자발적 고립에 대해서 말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말한 고립에의 찬미를 열렬하게 반겼다. 그러니 처음 저 문장을 읽고 어찌 의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건 배수아의 스타일이 아니야,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립을 찬미하고 이방인 놀이를 즐기며, 음악과 꿈, 죽음에 대해 사색하던 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겪은 것일까?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이전의 소설들에는 모종의 우려, 두려움 같은 것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고, 거침이 없었으며, 늘 한결같은 자세와 분위기를 유지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혹은 생각은 했으되 직접 실행하지 못했던 어떤 경지, 태도를 견지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고립을 찬미하고(『동물원킨트,』) 언어보다는 더 많은 음악을 원했으며(『에세이스트의 책상』), 사회적인 통념과 지배적인 이념보다는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절대정신의 세계를 추구했고(『독학자』), 꿈의 세계로 망설임 없이 유영해 들어갔다(『북쪽 거실』). 하지만 이번 소설에서 그는 조금 조심스러워진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건설하고자 하는 세계가 번번이 현실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어졌기 때문인지도.

 

이런 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하려는 말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나조차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으므로. 분명한 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뿐. 그것은 무정형의 덩어리처럼 존재하다가 한 단어, 한 문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하면 두서없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입구 없는 비닐봉지에 든 물을 송곳이나 못으로 어느 한 지점을 툭 찔러주어 새어나오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배수아의 소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그의 문장은 마치 물이 새어나오듯 거침없어 보인다. 물론 두서없고, 맥락이 없고, 분절되고, 현실성이 제거되고, 추상적이며 환상적이기까지 문체와 구성, 내용은 읽기에는 무척이나 즉흥적이고 자유로워 보이기까지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 것이다. 클레나 칸딘스키의 추상이 아무렇게나 그려진 것이 아니듯이.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추상화나 초현실적인 회화를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환상 혹은 신기루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주인공인 아야미와 그녀를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살아 숨 쉬는 개별자들인가? 혹은 분열된 하나의 자아인가? 혹은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유령? 책 뒤편에 실린 김사과의 해설처럼 그것은 꿈이고, 작가는 꿈의 기록자인가? 이것은 꿈이므로 어설프게 해석하려 들지 말고, 그저 꿈의 분위기, 꿈의 감정을 느끼면 되는가? 그렇다. 이 소설이 꿈에 관한 기록이라는 독법은 그럴듯하고, 설득력이 있다. 꿈을 꾸고 난 아침이면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만이 잔해처럼 남아있듯이. 이 소설 또한 그러하다. 그렇게 남겨진 감정은 불가해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소설 속 아야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와 폐관을 하루 앞둔 오디오 극장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포갤 때, '나는 하나의 감정이에요.'라고 말할 때처럼.

 

이 소설은 그런 매혹적인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것이 꿈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작가는 그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초대? 그렇다. 앞서 말했듯이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보이지 않던 어떤 '조심스러움(?)' 혹은 모종의 '변화'를 '초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그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말한다. 아니, 애원한다. '지금 당신이 가고 있는 그 다른 세계로 나를 데려다줘요.' 라고. '서로에게 닿지도 않은 채 하나가 돼'는 그런 세계로.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내 '손등을 스치듯이 만지며 가운데 손가락으로 내 손목 안쪽 어느 특정 부위를 마치 맥박을 측정하려는 행위인 양 한동안 지그시 누른다.' 그는 나를 독특한 방식으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초대에 응한다. 소리의 그림자를 듣는다. 알려지지 않은 목소리를 듣는다. 꿈에 참여한다. 혹 작가의 이처럼 독특한 초대에 응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영원히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에 대해서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는 알려고도 하지 않겠지만. 그건 분명 고독한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듯이, 고독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어떤가.

 

멀리 떠나지 말아요, 단 하루라도, 왜냐하면

왜냐하면……하루는 길고

나는 당신을 기다릴 테니까.(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