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민음사, 2013.

시월의숲 2013. 8. 1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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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436~4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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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소설은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정의 기록이 아니었을까?

어떤 믿음으로 가득했던 한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기 위해서 순례를 떠난다.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임을 깨닫기 위해. 아오, 아카, 시로, 구로, 쓰쿠루 이렇게 다섯 명으로 충분했던 시절.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유대, 그로부터 오는 충일감. 그렇듯 이상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간의 적정한 선을 유지한다. 하지만 어느것도 영원한 건 없는걸까? 그리고 그편이 보다 자연스러운 것일까? 완벽하게만 보이던 그 공동체가 어느순간 금이 가기 시작하고, 결국 쓰쿠루는 절교를 당한다. 그는 영문도 모른채 떨어져나와 한동안 죽음만을 생각하며 방황한다. 왜 그들은 나를 버린 것일까? 어떤 이유도, 설명도, 비난도 없이. 쓰쿠루는 생각한다.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알 수 없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죽음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다행히 쓰쿠루는 죽음을 피해 살아남았고, 당연하게도 그는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쓰쿠루가 된다.

 

하지만 어떻게든 문제를 풀지 않고는 인생의 어느 마디를 넘길 수 없는 시기가 오는 것일까? 그는 자신의 여자친구인 사라의 조언으로 16년 만에 자신을 추방한 친구들을 찾아나선다. 마치 어떤 깨달음을 찾고자 순례를 떠나는 사람처럼. 친구들을 한 명 씩 만나면서 그는 깨닫는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모두 자신을 믿고 있었고, 그를 추방한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이 색채가 없고 늘 텅 비어있는 사람같다고 생각하지만(친구들의 이름에는 모두 색이 들어가 있으므로) 정작 텅 비어있는 사람은 그가 아니라 친구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친구들은 그가 언젠가 자신을 찾아오리라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쓰쿠루로 인해 그들은 비로소 그들이 되고, 쓰쿠루 또한 그들로 인해 쓰쿠루 자신이 된다. 그런 치유와 깨달음은 과거 그들이 공유했던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때 그들은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신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마음은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는 종류의 것이 아님을 나 또한 믿는다. 비록 그들이 앞으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바로 쓰쿠루가 죽음만을 생각하면 살고 있을 때, 삶쪽으로 귀환을 도왔던 하이다라는 친구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친구에게 매력을 느꼈는데, 소설 초반에 나오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많이 아쉬웠다. 자신의 아버지가 겪은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만 쓰쿠루에게 잔뜩 전해준 채. 물론 하이다는 쓰쿠루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게 하는 매개 역할을 하는 인물임은 알겠다. 그래도 무언가 석연찮다. 이건 하이다에게 어쩐지 부당한 일인 것만 같다. 하이다의 돌연한 사라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쓰쿠루가 과거에 친구들에게서 추방당했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고 현재 그들 사이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인가? 과거를 대면하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아니면 쓰쿠루는 어쩔 수 없이 이성애자(그렇다고 하이다가 동성애자라는 것은 아니지만)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어 쓰쿠루는 죽음에서 헤어나올 수 있지 않았던가? 쓰쿠루의 순례가 '조화로운 공동체'의 기억을 환기시키며, 결국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의 상처를 보듬어 안았을지는 몰라도, 하이다의 사라짐에 대한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그 또한 순례의 여정에 포함시켰어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흐트러짐 없이 조화로운 공동체'의 이상에 벗어나는 것이 되는가?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아니 읽는 도중에도 당연히 리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가 듣고 싶어진다. 일반적으로 향수나 멜랑콜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그리고 수영이 무척 하고 싶어진다. 나도 쓰쿠루처럼 수영을 하고 있으면 머릿속 생각이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알게 될까?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나고야나 핀란드에도 가보고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듣고 싶어지거나 하고 싶어지는 것들이다. 그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매력 혹은 마력이겠지. 적당한 멜랑콜리와 적당히 고독한 사색, 적당히 이국적인 풍경과 적당히 자유롭고 쿨한 사유. 오래전에 읽은 <상실의 시대>나 <스푸트니크의 연인>이 얼핏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이 소설만의 아름다운 여운이 있다. <상실의 시대> 이후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여전히 젊고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