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부엉이』, 문학과지성사, 2013.

시월의숲 2013. 7. 31. 01:09

 

 

 

이 소설 또한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처럼 배수아라는 이름 때문에 읽게 되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는 배수아가 쓴 짤막하고도 인상적인 소개글 때문에 읽게 되었고,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는 아예 배수아가 번역한 것을 읽었다는 것. 배수아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독일어로 된 문학작품을 번역하는데 희열을 느끼는 열렬한 번역가이기도 하다(이 소설은 독일어로 번역된 페르시아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다). 창비 라디오 팟캐스트에서 그는 소설가로서의 자신과 번역가로서의 자신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이란 문장을 완전히 해체해서 새로이 조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은 꽤 위험하고도 용감한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배수아처럼 자신만의 색채가 뚜렷한 작가라면 과연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배수아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배수아가 직접 선택하고 번역한 소설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가 번역한 모든 소설이나 글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의 경우, 배수아가 번역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더라도, 첫 문장의 강렬한 이끌림으로 인해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헤다야트의 <눈먼 올빼미>의 첫 문장과 비교해도 내 취향은 확실히 배수아 쪽이었다. 강렬했던 첫 문장이란 이것이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7쪽)

 

이 문장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문장을 읽고난 뒤 다음 문장을 읽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필통에다 그림을 그리는 가난한 예술가이자 병에 걸린 주인공이 아편과 술에 의지해 살면서 아내를 살해하고 암매장한 뒤 환상과 현실 사이를 서성거리며 그것을 기록하는 것이 이 소설의 내용이다. 아, 서성거린다는 말이 무척 얌전하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환상과 현실의 중간지대란 실로 무시무시하게 압도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게 압도적인 풍경은 이야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면에서 나온다. 주인공은, 자신의 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 순간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때가 없으며, 다른 인간에 대해서는 굉장히 비관적이자 비판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을 창녀가 부르기를 서슴치 않으며, 그럼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16쪽)'라고 믿고 있다. 그녀는 창녀인가, 천사인가? 코브라의 심판을 받고 나온 사람은 진정 자신의 아버지인가, 쌍둥이 삼촌인가?

 

어느 것이 환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알 수 없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해 늘 아편에 취해 지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편은 고통을 근본적으로 치유해주지는 못한다. 단지 고통스러운 육신과 자신의 비참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줄 뿐. 그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그가 보는 것은 고통스럽고도 환희에 찬 환상과 고통의 일그러짐이다. 어느 것이 환상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알 수 없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이 소설은 그렇게 무너지고, 희미해지며, 불투명해지는 경계 사이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그 풍경은 때로 잔인하고, 고통스러우며, 어둡고, 고독하지만 불가해한 아름다움 또한 지니고 있다. 특히 '코브라의 심판'은 이 소설의 핵심적인 삽화로서 앞서 말했던 불가해한 아름다움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고,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불명확하며,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있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코브라와 함께 갇혀 본 적이 있는 자만이, 그 어둠과 공포를 아는 자만이 쓸 수 있는 풍경이다. 코브라의 심판을 받은 자는 이전의 자신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한 번 눈이 멀면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듯이.

 

독특하고 음울하며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