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어쨌든 메리 크리스마스

시월의숲 2013. 12. 25. 18:12

어제 동생이 전화를 걸어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말했다. 새삼스럽게 무슨 크리스마스 인사인지. 나는 전화까지 걸어준 동생이 무안할까봐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했지만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런 종교도 가지지 않은 나는, 석가탄신일이 그렇듯, 성탄절 또한 하루 쉬는 날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종교가 없어도 절이나 교회에 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동생의 새삼스러운 인사에 얼떨떨해진 나는 어떤 '의미'를 가진 날에 대해서 생각했다. 삶은 기본적으로 너무나 지루하기 때문에 무슨 구실을 붙여서라도 기념을 하고, 사진을 찍고, 특별한 음식을 만들고 선물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무슨무슨 날이라고 이름 붙여진 날을 무슨무슨 이유로 서로 기념하는 것은 삶이 특별할 것 없다는 사실의 반증이 아닐까 하는. 무의미한 날들 속에서 실낱같은 의미라도 부여해야만 이 지루하고 시궁창같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인간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무도 발설하진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함부로 발설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쓸쓸함에 스스로 목을 멜 수도 있음을 예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너무 부정적이고 암울한 망상일 뿐인가? 글쎄, 나는 단호하게 아니다, 라고 대답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의 삶은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운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