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너무 현실적이거나 혹은 그 반대거나

시월의숲 2014. 1. 27. 20:40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래. 그런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지. 그렇기 때문에 애인이 없거나, 결혼을 하지 않고, 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대방을 꼼꼼히 따져보게 되는거지. 그러다보면 자연히 결혼이 늦어지고 심지어는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는거야."

 

그가 그 말을 했을 때, 주위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그래, 를 연발했다. 이윽고 나를 바라보며, "나는 네가 그런 것 같아." 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정말 그런가 생각해보다가 엉겹결에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나는 내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어쩐지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우리는 그때 엉뚱하게도 아이돌과 팬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지금은 빅뱅이나 엑소, 소녀시대같은 아이돌이 인기지만, 그때는 HOT나 잭스키스, SES나 핑클 같은 그룹이 인기였다고. 나는 내 동생의 예를 들며, 당시 온 방의 벽을 점령했던 HOT의 브로마이드와 멤버 개개인별 책받침과 엽서, 열쇠고리, 필통, 노트 등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다 나는 어땠냐고 누군가 물었고, 나는 동생처럼 열광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하지는 않았고, 그저 라디오를 듣거나 마음에 드는 노래가 있으면 테이프를 사서 듣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넌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래.'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맞는지 모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 내 삶을 180도 바꿔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내가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좋아한들, 그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내가 매사에 현실적이어서 그런 것일까? 사실 그 반대의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해서 오히려 현실감을 잃어버린 것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가 말했던 사랑이라는 것도, 내가 누군가를 만날 때, 너무 따지고들어서 만나기 힘든 것이 아니라, 환상 속에 이상형을 만들어놓고 현실의 인간과 비교해보기 때문에 만나기 힘든 것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가 덧붙여 말했다. 사랑을 할 때는 약간의 맹목성, 순진성, 저돌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건,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만든 환상-아무도 도달할 수 없는-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주위의 현실은 시궁창일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환상만 쫓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는 사람을 현실세계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그리는 사람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데! 양 극단에 있는 것들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마주설수 없지만, 자석이 서로 다른 극끼리 몸을 붙이듯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가 내게 한 말-너무 현실적이라는-은 동시에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말, 붙잡을 수 없는 이상향을 꿈꾸고 있다는 말과 '다르면서' 결국 '같은' 말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무 현실적이거나 혹은 그 반대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