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이중섭 미술관에서 만난 개

시월의숲 2014. 2. 8. 22:41

 

 

2박 3일의 일정으로 제주도를 다녀왔다. 갑작스럽고도 내키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제주도행 비행기를 탔고, 제주도에 내렸으며, 제주도를 보았다. 여행의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으니 많은 관광지를 돌아다니지는 못했다. 위 사진은 이중섭 미술관에 갔을 때 이중섭 거주지 앞마당에서 찍은 것이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개는, 사람들의 잦은 출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상 위에 누워 묵묵히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가가 쓰다듬기에도 머쓱한 표정이라서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사람들이 떠들든 사진을 찍든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개의 사진을 한 장 찍은 후, 이중섭이 말년에 거주했다는 1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방을 구경하고 이중섭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에 한 번 왔다가 마침 월요일이라서 들어가보지 못한 기억이 있었다. 1층은 이중섭의 은지화라는 타이틀로 상설 전시를 하고 있었고, 2층은 제주도의 특산인 말을 주제로한 여러 작가들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처음엔 '은지화'라고 해서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옛날에 담배를 싼 은박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전쟁통에 미술 재료를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중섭은 담배갑에 들어있는 은박지를 펼쳐 거기 날카로운 물건(송곳 같은 것)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은지화'라는 꽤나 거창한 이름이 실상은 빈곤함의 산물이었다니,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습작 같아 보이는 작품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중섭이 가지고 있었든, 다른 누군가가 소장을 하고 있었든 지금까지 남아 전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중섭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거기엔 이중섭이 사용하던 파렛트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실제로 유화의 파렛트가 그 정도로 큰건지 잘 모르겠지만, 무척 커보여서 들고 그리기엔 좀 무거워보였다. 그리고 이중섭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아쉬웠던 건, 이중섭 미술관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이중섭의 그림이 적다는 것이었다. 이중섭의 그림은 개인소장이 많은 것일까? 제주도에서 살았던 기간이 일 년 남짓이었기 때문에 제주도와 관련되거나 제주도에 살던 시절에 그렸던 작품들이 많이 없기 때문인가? 알 수 없다. 아쉬움을 달래려 이중섭의 황소그림이 그려진 마우스 패드를 샀다. 산책로를 따라 미술관을 나와 주차장에서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이중섭 거주지에서 나를 본채만채 했던 개가 꼬리를 흔들면서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서 물끄러미 개를 바라보았다. 의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먹을 게 있었다면 뭐라도 주었을텐데, 내겐 이중섭 그림이 그려진 마우스 패드밖에 없었다. 개는 한참 내 곁에 머물더니 어느 순간 휙 하고 가버렸다. 잘 가라는 인사였던가. 같이 기다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마음속으로 건넸다. 아무래도 그 개는 이중섭 미술관의 지킴이임과 동시에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