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쓸쓸해서 머나먼

시월의숲 2014. 3. 19. 23:24

밝고 환한 것, 싱그럽고 푸릇푸릇한 것, 끊임없는 생명력으로 가득한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완연한 봄이 오면, 온 세상은 그러한 것들로 가득하겠지만, 어쩐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고, 나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인 것만 같다. 블로그의 타이틀 배경도 녹색빛으로 환하게 꾸몄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나는 내 블로그에 들어올 때마다 마냥 어색하고, 때로 얼굴이 화끈거리기까지 한다. 이건 어찌된 일일까? 불과 며칠만에 급격하게 따뜻해진 대기와 햇살과 바람도 예전만큼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아무 표정 없는 거리와 그 거리의 사람들, 아무런 보람을 느낄 수없는 직장에서의 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늪에 빠져버린 것일까? 사람들은 그저 나를 스쳐지나갈 뿐, 내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오히려 저들의 배려와 관심이 부담스러워, 나는 말을 아끼거나, 얼른 자리를 피한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감정 없는 웃음을 웃으며, 속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무도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고, 나조차 그러하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점차 힘들어진다.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힘들어진다.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자포자기의 심정, 기대 불가능성, 소통 불가능성, 끝내는 어떤 파국에의 예감 때문에, 나는 점차 말을 잃는다. 표정을 잃는다. 감정이 사라진다. 어제 읽었던 4년 전 신문기사 때문인가? 아니면 요즘 읽고 있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때문인가? 전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어느정도는 영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제 충격적인 기사를 읽었다. 2010년도에 일간지에 실렸던 것인데, 최승자 시인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그 기사를 읽고 대학교 때 최승자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다. 현재의 근황은 알 수 없으나, 그 기사에 따르면 2010년 당시 그녀는 정신분열증에 걸려서 요양원에서 요양중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돌봐줄 가족이 없었고, 고시원과 여관방을 전전했으며,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이 오지 않아 소주를 마시고 쓰러져 잤다. 강박감에 시달리고, 환청이 들리고, 헛소리를 내뱉었다. 기사에 실린 사진 속 시인의 모습은 그녀가 젊은 시절 토해낸 그 어떤 격렬한 시보다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시인 자신이 바로 시가 된 것 같았다(이건 시인에게 모욕일까). 무엇이 한 시인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 이런 내 의문은 아마도 최승자의 시를 읽은 모든 사람들의 의문이었을 것이다. 인터뷰어가 시인에게 물었다.

 

―우리 시대와 사회가 시인에게 상처를 준 것일까요? 오늘 찾아온 것은 사실 이 때문입니다.

"그건 틀린 말입니다. 자기 삶을 사회나 남에게 전가할 수는 없어요. 괜히 '우리 시대가 저 친구를 버려놓은 것이 아닌가' 말하는데, 이는 내가 선택한 삶이었어요. 나 혼자 겉돌았고 그런 공부를 했고 병원에 들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내부의 작용이 있었다는 것. 그녀는 이곳보다 더 나은 곳, 현상을 뛰어넘는 곳에 대한 갈망이 너무도 강했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듯, 그녀는 너무나도 투명하였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내면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당시 최승자 시인이 긴 침묵을 깨고 출판한 <쓸쓸해서 머나먼>을 내가 가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모른채 시집을 읽은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잊고 있었던 아픔이 저 멀리서 눈물을 흘렸다. 유폐된 기억이 되살아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시가 어떻게든 그녀를 이끌고 왔다면, 앞으로도 이끌고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앞날의 계획도 시를 쓰는 것이라고 하니 어쩌면 그녀는 신병(病)을 앓는 무당처럼, 그렇게 詩의 炳을 앓고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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