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나한테 오지 않았어.
겁먹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밀려오길래, 먼 데서부터
밀려오길래
우리 몸을 지나 계속
차오르기만 할 줄 알았나 보다
바다가 너한테 오지 않았니
하지만 다시 밀려들기 시작할 땐
다시 끝없을 것처럼 느껴지겠지
내 다리를 끌어안고 뒤로 숨겠지
마치 내가
그 어떤 것,
바다로부터조차 널
지켜줄 수 있는 것처럼
기침이 깊어
먹은 것을 토해내며
눈물을 흘리며
엄마, 엄마를 부르던 것처럼
마치 나에게
그걸 멈춰줄 힘이 있는 듯이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저 반짝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함께 품었던 시절의 은밀함을
처음부터 모래로 지은
이 몸에 새겨두는 일뿐인 걸
괜찮아
아직 바다는 오지 않으니까
우리를 쓸어 가기 전까지
우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흰 돌과 조개껍데기를 더 주울 테니까
파도에 젖은 신발을 말릴 테니까
까끌거리는 모래를 털며
때로는 주저앉아 더러운 손으로
눈을 훔치기도 하며
- 한강, '효에게. 2002. 겨울' 전문,『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
한강의 시집이 나오기도 전에 나는 그녀가 이 시를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희랍어시간』을 발표한 후였던 것 같다. 인터뷰를 하다가 이 시를 읽었던 것 같은데, 왜 소설 속의 한 대목이 아니라 이 시를 읽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내 기억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녀는 이 시를 읽었고, 훅 불면 꺼질듯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지 못할 그녀의 음성을 나는 들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동안 많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효'는 지금쯤 제법 컸겠지. 나는 한번도 보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볼 수 없을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엄마가 자신에게 쓴 시를 읽으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어쩌면 그녀가 어렸을 때 읽었을 아버지의 글에서처럼, 그 글에서 느꼈을 무언가를 '효' 또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짐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모래로 지어진 몸에 새긴 색색의 알 같은 순간들을' 반추하며 아직은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하지만 나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바다가 쓸어가기 전까지 나란히 서 있을 누군가를 곁에 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느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