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갈증

시월의숲 2014. 5. 11. 20:39

집에만 있기가 답답하여 가방에 책을 한 권 집어넣은 채 밖으로 나왔다. 온다던 친구는 오지 않았다. 체크무늬의 긴 소매 셔츠와 청바지가 좀 덥게 느껴졌다. 밤부터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었는데, 과연 어제보다 하늘이 조금 흐렸다.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나를 집 밖으로 이끌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습관처럼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타고 다니는 버스였다. 아무 생각 없이 버스에 올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목이 말랐으나 버스에 올라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뒷자리에 앉아서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람들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건물들과 나무들, 강을 바라보았다. 내가 탄 버스는 두 번의 긴 다리를 건넜다. 그 말은 강을 두 번 지났다는 뜻이었다. 두 개의 다리를 건너 도착한 종점은 내가 오래전에 다니던 대학교였다. 나는 떠밀리듯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캠퍼스를 걸었다. 목이 말라 자판기를 찾았으나 물은 없었다. 이온음료를 하나 뽑아들고 조금씩 마시면서 걸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학기 중이라서 그런지 학생들이 제법 많았다. 대운동장에는 무얼 하는지 모를 학생들이 가득 모여 있었고,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으려고 찾아간 인문대는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나는 순간 길 잃은 아이같은 심정이 되었다.

 

황망히 걷다보니 얼마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시사프로그램이 떠올랐다. 대학교의 신입생 엑스맨으로 불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는 수년간 전국의 수많은 대학교의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을 했다. 그와 함께 동아리 엠티를 따라갔던 사람들의 증언이 하나 둘 씩 공개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가명으로 활동을 하면서 진짜 이름을 가진 사람에게 협박을 하기도 하고, 동아리 선배의 집에서 자거나, 돈을 빌려서 갚지 않는 등의 일도 서슴치 않았다. 놀라운 일은 그의 아버지가 서울의 유명 대학의 교수라는 것이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대학교에도 입학했지만 중도에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사회자는 그에게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자신이 꿈꾸는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자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그것을 사실이라 믿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놀랍고 씁쓸했다. 그것이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건 우리나라의 학벌 지상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 아니었을까?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하는가? 그는 말했다. 신입생 동아리에 가면 자신이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그것이 좋다고.  적어도 그곳에서만큼은 자신이 명문대학교를 가지 못했다고 업신여길 어른도, 그래서 기가 죽을 일도 없는 것이다. 나는 그때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아픈 것이다. 멸시와 차별에 유난히 예민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나는 가방 속에 들어있는 책을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앉아서 읽을만한 벤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순간 난감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내가 마치 그 신입생 엑스맨처럼 느껴졌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나를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의 시선과 아무 거리낌 없는 그들의 웃음과 활기가 나를 처형하고 있는 듯 느껴졌다. 나는 처형 당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황급히 버스에 올랐다. 나는 왜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나는 무엇 때문에 버스를 타고 그곳에 가서 아무 이유 없이 걷고, 헤맸을까? 나는 왜 나를 리플리 증후군에 걸린 신입생 엑스맨처럼 느꼈을까? 그가 바란 것과 내가 바란 것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정말 그런 것일까? 열린 창으로 세찬 바람이 들어와 내 얼굴을 때렸다. 나는 버스 차창을 닫았다. 또다시 갈증이 일었다. 이온음료로는 해소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 나는 물이 필요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부리나케 들어와 냉장고를 열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급하게 물을 마셨기 때문인지 눈물이 찔끔났다. 물을 마셨지만 목은 계속 말랐다. 이해할 수 없는 갈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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