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푸르른 틈새

시월의숲 2014. 5. 1. 00:31

알 수 없는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말하기가 망설여진다. 언제고 다시 게릴라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며칠 간의 내 상태와 지금의 상태를 비교한다면, 분명 나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주문처럼 중얼거렸던 '괜찮다'는 말이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효과가 있었을 거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오늘 오후에 태양이 비추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태양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일을 하면서 혹은 커피를 마시면서 자주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든 사물에 내려앉은 빛의 테두리를.

 

점심을 먹 천천히 일터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 정원에 피어있던 모란은 짙은 자주색의 꽃잎을 뚝뚝 떨구고 있었지만, 수국은 공기밥처럼 하얗고 둥글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서 아직은 내 주먹만한 크기의 수국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하앟고 작은 나비떼가 한 무더기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모란과 수국을 지나 소나무와 목련, 벚나무와 모과나무를 지나면 정원 한 귀퉁이에 조그마한 밭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상추와 배추, 부추 등이 심겨져 있다. 나는 수국을 살펴 볼 때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막 돋아나기 시작한 상추의 연둣빛 잎들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새순의 싱그러움이 내 손에 전해지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내가 손을 대기만 하면, 모든 사물의 정수(精髓)가 내게 전해지는 상상을. 그래서 내가 손을 대는 모든 것들과 서로 교감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나는 그것이 터무니없고 유치한 발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러한 상상만으로도 내 가슴은 벅차오른다.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벅차오르는 감정은 무엇일까? 지난 며칠 간 나를 괴롭혔던 그 감정의 정체는 다 무엇이었나?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없다면 누가 있어 나를,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지는 모란을, 피는 수국을, 향기로운 등나무를 생각해야 한다. 막 피기 시작한 잎사귀의 푸르름에 내 눈과 마음을 씻어야 한다. 그리고 태양을 바라볼 것. 태양이 있음을 늘 생각할 것. 내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이다.

 

권여선의 <푸르른 틈새>라는 소설이 있다. 오래전에 읽었으므로 무슨 내용인지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 제목만이 유난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푸르른 틈새, 라고 발음해 본다.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말한다. 푸, 르, 른, 틈, 새. 내 마음 속 어딘가 푸르른 틈새가 생기는 것 같다. 나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말한다. 푸른 틈 사이로 환한 빛이 쏟아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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