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여름의 맛

시월의숲 2014. 8. 13. 22:53

시간이 뭉텅뭉텅 베어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돌아서면 일주일이 지나있다. 8월인가 싶더니 벌써 중순이다.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걸까. 하지만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아도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시간에 정신을 차릴수가 없다. 아마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일 것이다. 내 앞에 닥친 일, 당장 해야하는 일, 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일, 그런 일 말이다(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저번주에는 휴가랍시고 하루 연가를 내고 쉬었다. 명색이 휴가였지만, 바다를 보러 가지도 않았고, 캠핑이나 인근 계곡에 가지도 않았다. 비가 오락가락하기도 했고, 사람들 붐비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아서 그냥 영화 보는 것을 택했다(물론 영화관에도 사람들이 많긴 했지만). <군도>와 <명량>을 보았는데 나는 <명량>보다도 <군도>가 더 마음에 들었다.

 

<명량>의 흥행은, 진중권의 말대로 영화의 완성도랄지, 매력에 있다기 보다는 이순신이라는 개인의 매력이 더 컸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재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는 나름 '명량'이라고 하는 해전에 집중하여, 우리가 알고는 있었지만 결코 직접 볼 수는 없었던 장면들(그것이 실제 전투와는 조금 다르더라도)을 커다란 스크린에 펼쳐보인다. 하지만 이순신의 영웅적인 면모와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역으로 '백성들'을 이용하거나 그들의 입을 통해 작위적이고 노골적인 대사를 읊게 하는 것은, 극적인 상황이 펼쳐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 와닿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백성을 위해 이순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만들기 위해 백성이 존재하는 듯한 생각마저 들게했다.

 

반면 <군도>는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두 시간 반 정도 되는 시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양한 캐릭터로 분한 배우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 모두가 주인공인가 싶다가도, <군도>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강동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정우가 맡은 도치라는 캐릭터의 모습과 모든 면에서 극명하게 대조되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그것이 도를 지나쳐서 영화의 주제를 흐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도적들의 캐릭터가 많고 그들의 주적인 캐릭터는 많지 않아서 과연 강동원 한 명만으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까 생각했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조윤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일그러진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제법 크게 느껴져서 도적들과의 대결에서도 결코 약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무술의 고수라는 설정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지적했듯이 영화의 후반부에 강동원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모습을 넣은 것은 영화의 현실성을 다소 떨어뜨리는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렇게 친구와 나는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약간의 드라이브를 했다. 드라이브라고 해봤자 인근에 있는 전문대학에 간 것이 전부였다. 방학이라 학생들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조용하고 기분좋게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예전에 한 번 이 대학에 와본적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날씨는 흐렸고, 바람이 적당히 불었다. 여름이지만 여름같지 않은 날씨였다. 시간이 많은 우리는 천천히 캠퍼스를 거닐며 건물을 감상하고, 인공정원과 인공폭포, 소나무와 능소화를 보았다. 교정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뿐만 아니라 다양한 나무들이 많았다. 나무들이 많았으므로 당연히 그 아래는 그늘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나무 그늘 아래를 걸으며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기를 반복했다. 좁은 공간에 볼품없는 건물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대학교보다는 짙푸른 나무들과 깊은 그늘이 많은 이곳이 훨씬 근사했다.

 

걷다가 하얀 페인트로 칠해진 건물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앉아 있으니 눕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 누웠다. 당연하게도 시야에는 흐린 하늘이 들어왔다. 문득 하늘을 보기 위해 하늘을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날의 날씨를 짐작하기 위해 혹은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것 말고, 내가 하늘을 보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아, 내가 지금 하늘을 보고 있구나, 하늘이 저런 빛깔을 띠고 있구나, 하늘과 내가 서로 마주보고 있구나 하고 느끼는 순간 말이다. 그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 바닥에 누워야만 하늘을 볼 수 있다고. 하늘과 진정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지상에 몸을 누워야만 한다고. 마치 아이와 진실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아이의 눈높이 맞춰 무릎을 꿇어야 하듯이. 별거 아닌 행위지만 새삼스럽게 받아들여진 느낌 때문에 인식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 듯한 놀라움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한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친구는 그런 내 모습이 이상한지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지만 나는 전혀 게의치 않았다. 날은 금방 저물어 저녁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움을 뒤로한채 우리는 그곳을 나왔다. 그것이 내 진정한 여름 휴가의 마지막이었음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짧은 시간 벤치 위에 누워 하늘을 보던 그 순간이 올 '여름의 맛'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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