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선물

시월의숲 2014. 11. 22. 12:11

하루키의 소설집을 처음 가지게 된 날을 기억한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해서 멍한 얼굴로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학과에서 문집 비슷한 것을 만들었는데, 거기 편집을 맡은 친구가 아무 내용이라도 좋으니 글을 좀 써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때는 한창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던 시기(광고 덕분에)였는데, 나또한 그 소설을 읽고 하루키에 빠졌던 터라 독후감을 써내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며칠을 고민해서 독후감을 썼고, 결국 내가 쓴 글이 학보에 실렸다. 같은 과 학생이면 누구나 글을 써서 낼 수 있었고, 사실 원고가 없어서 학생들에게 일일이 부탁할 정도였으니, 학보에 내 글이 실렸다고 해서 그리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지만, 나중에 내가 쓴 글이 실린 학보를 받아보니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유치하고(지금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지만), 감정 과잉에, 중2병스러운 문구로 치장된 글이었지만, 어쨌든 그때는 어렸고, 그래서 그걸 몰랐고, 몰랐으므로 용감했다. 그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같은 과의 선배가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집을 건네주며 말했다. "네가 쓴 글 읽었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혹시 단편소설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좋아하겠지. 선물이야." 그때 나는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누군가에게서 '선물'이란 것을 받았다. '선물'이라는 것이 반드시 생일에만 주고 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그때 새삼 깨달았다. 나는 정말 뜻밖의 선물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그저 고맙다고만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하루키의 단편집을 가지게 되었고, 읽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 책은 사라져버렸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빌려주었던가? 혹은 누군가 내 책장에서 내 허락도 없이 가져가버린 것인가? 기억나지 않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그 기억만 누군가에 의해 지우개로 지워져버린듯이. 이번에 새로 나온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소설집을 읽고 나니, 처음 선물로 받은 그 책이 자꾸만 생각난다. 책도, 기억도, 사람도, 자꾸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삶인지. 그것이 삶이 주는 선물이라는 말인지. 이상하게도 내게 하루키의 책을 선물한 그 선배의 얼굴만은 또렷하게 떠오른다. 그는 내게 책을 주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나라는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색 詩  (0) 2014.12.01
정동진  (0) 2014.11.29
사소한 생각들  (0) 2014.11.14
내가 가진 것  (0) 2014.10.29
내가 아닌 나  (0) 2014.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