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문학동네, 2012.

시월의숲 2015. 2. 11. 23:07

한스는 오후 내내 하일너를 생각했다. 대체 어떤 아이일까? 한스가 갖고 있는 걱정과 소원이 그에게는 아예 없었다. 하일너는 그만의 생각과 말을 가지고 있었고, 남들보다 더 자유롭게 살았다. 이상한 고민을 하며 괴로워하고, 주위 사람들을 다 경멸하는 듯했다. 또 오래된 기둥과 담장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자신의 영혼을 시로 표현하고, 상상으로 고유한 허구의 삶을 만들어내는 기묘하고 신비한 재주가 있었다. 명민하고 구속을 싫어하며, 한스가 1년 동안 할 농담을 매일같이 했다. 그는 우울했지만 자신의 슬픔조차 이국의 진기하고 귀중한 보물처럼 즐기는 것 같았다.(88~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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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베면 뿌리 근처에서 종종 새싹이 움터나오듯이 한창 때 병들고 상한 영혼 역시 새로 시작하는 꿈 많은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마치 그곳에서 새 희망을 찾고 끊어진 삶의 끈을 새로 이을 수 있다는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빠르게 쑥쑥 잘 자라지만 그것이 찾은 건 가짜 생명이고 다시는 제대로 된 나무가 될 수 없다.(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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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가슴 설레게 변했다. 과일찌꺼기를 먹고 통통해진 참새들이 시끄럽게 재잘거리면서 하늘을 날아다녔다. 하늘이 그토록 높고 아름다우며 그리움에 사무치도록 파란 적이 없었다. 강의 수면이 그토록 깨끗하고 청록색으로 밝게 빛났던 적도 없었으며, 방죽에서 물이 그토록 눈부시게 하얀 거품을 내면서 쏴쏴 흐른 적도 없었다. 모든 것이 멋진 그림처럼 새로 채색되어, 맑고 산뜻한 유리창 뒤에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큰 축제가 시작되길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한스의 가슴속에서는 이것이 꿈이고 절대 현실이 될 수 없다고 의심하는 소심한 두려움과 함께, 묘하게 무모한 감정과 이상하게 눈부신 희망이 가슴 조이도록 강하고 불안하고 달콤하게 파도쳤다. 서로 모순되는 그 느낌들이 신비로운 샘물이 되어 솟구치며 부풀어올랐다. 그의 내면에서 뭔가 아주 강력한 것이 속박을 끊고 자유롭게 숨쉬려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흐느낌 같기도 했고, 노래 같기도 했으며, 고함소리나 커다란 웃음소리 같기도 했다.(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