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배수아, 《잠자는 남자와 일주일을》, 가쎄, 2014.

시월의숲 2014. 12. 9. 22:43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많은 여행을 다녔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나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행이 화제에 오를 것으로 기대한다. 내가 이 세계의 신비한 땅들을 많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여행기를 쓸 거라고 기대한다. 그들은 내가 최소한 베를린과 독일에 대해서라면 뭔가 할 말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면 나는 그들에게 오래오래 설명해야 한다. 나는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고. 나는 여행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나는 여행지에서 누구도 만나지 않고, 내 여행은 항상 아무런 계획이 없고, 나는 여행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꿈꾸어 본 적도 없다고. 심지어 순수한 마음의 동기에 의해 자발적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본 적도 거의 없을 정도라고. 내 여행은 내 여행 가방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하고 혼돈스럽다고. 여행지에서 나는 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혼자이며,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고. 나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내 여행은 목적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라고. 내 여행은 일도 아니고 휴가도 아니라고. 내 여행은, 작가들이 오직 글을 쓰기 위해서 장소를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지 내가 있는 장소의 이동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내 여행은, 여전히 머뭇거리고, 길을 잃고, 말을 더듬으며, 내성적이며, 불안하고 그리고 불특정하다고.(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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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계를 넘어서고자 원한다기보다는 경계를 의식하지 않는 편입니다. 내가 소설에서 여행자를 즐겨 다루는 것은 여행이 사랑과 마찬가지로 충격을 체험할 수 있는 좋은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여행과 사랑은 흔들림이자, 충격이자 진동, 삶의 지진입니다.(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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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경계를 넘어서야겠다고 결심할 필요가 없어요. 세상을 바꾸려고 애쓰지 않으며, 타인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욕망도 믿음도 갖지 않습니다.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거나 경계를 넘어서고 싶다는 의지나 욕망이 없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으로 많은 경계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기묘하게도 그들 자신은 경계를 의식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 '의식하지 않음'으로 실제 경계를 해체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떤 조건하에서는, 그들에게는 경계가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해요.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런 삶에 관심이 있어요. 이런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계속해서 씀으로써, 이런 삶에 더더욱 다가가고 싶어요.(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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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남자는 자기 자신의 잠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한다. 이것을 위해서 그는 내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촬영여행을 떠난 곳은 중국 상하이였다.

그곳에서 잠자는 남자는 물었다.

 

혹시 밤중에 우연히 잠에서 깨어난다면, 그때 카메라로 내 잠을 찍어 줄 수 있겠어?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완전한 잠이어야 해. 잠든 척하고 있거나, 잠에서 깨어나 버리는 순간이 없는 순수한 잠을 촬영하고 싶어.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그런 상태는 아니야. 잠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면들을 너는 포착해야만 해. 잠은 현실의 그림자야. 현실의 무성영화야. 나는 잠을 살고 싶어. 내 잠을 찍는다는 것은 내 잠의 무성영화에 너도 함께 출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지금 나는 내 여행을 필름에 담으며 영화를 만들지만, 언젠가는 내 잠으로 이루어진 무성영화를 만들고 싶어. 제목은 <잠자는 남자>가 될 거야. 너는 내 잠의 인도자이며 내레이터가 되어야 해.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어?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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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직업과 관련된 글을 쓰면서 보낸다. 소설을 쓰거나 번역을 한다. 그런 글은 나만을 위한 글이 아니다. 그럴 때 나는 무목적적인 꿈이나 여행을 거의 잊은 듯하다. 그러나 일기를 쓰는 특별한 날이 오면, 갑자기 무엇인가가 달라진다. 잠의 성분이 바뀐다. 내 잠으로 무엇인가가 침투한다. 내 잠은 들뜬다. 내 잠은 술렁거린다. 나는 여행 가방을 싼다. 늘 그렇듯이 나는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한다. 나는 여행지로 간다. 여행지에서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잠을 찾아가는 사람처럼 잠의 나라를 여행한다. 오직 가만히 기다리는 일에만 열중한다. 기다리지 않으면서 기다리고, 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열중한다. 여행지에서 내가 가장 먼저 쓰는 글은 일기이다. 그것은 나만을 위한 글이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이다. 그것이 내 여행이다. 그럴 때 나는, 잠자는 남자와 함께 있게 된다.(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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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꾼 것은, 그러므로 잠자는 남자가 필름에 담은 바로 그것이었다. 어느 순간 내 꿈이 곧 잠자는 남자의 영화가 되었다. 꿈과 필름,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잠자는 남자의 카메라를 향해서 꿈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함께 꾸었던 지난밤의 꿈이 되었다.(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