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문학동네, 2012.

시월의숲 2015. 2. 14. 20:48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색채가 짙은 작품이라고 하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그는 1877년에 태어났는데,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개별적인 사건들(한스 기벤라트라는 주인공을 통해 형상화된)이 어떻게 2015년을 살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깊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인지,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슬펐다. 이 놀라움과 슬픔은 당시의 한 어리고 예민한 영혼에 내려진 보이지 않는 억압이, 현재를 사는 청소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 청소년뿐이겠는가?


그가 살았던 시절을 내가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소설 속 한스 기벤라트의 삶을 통해 짐작해본 그 시절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분명 다르다. 당시의 유럽은 신학이 우선이었고, 목사가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 혹은 명예처럼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공부를 잘해서 명문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그곳에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그중 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고, 자신과는 다른 성향의 친구에게 매료되어 그와 우정을 나누지만, 자신은 결국 학업성적이 떨어지게 되어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는 시계공이 되라며 그를 수습사원으로 보내고, 그는 난생처음 육체노동의 맛을 알게 되고, 어느 순간에 이성에 눈뜨게 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 어린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성장소설로 보기에는 좀 모호하다. 한스 기벤라트는 어른이 되기도 전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생을 마감(!)하게 되니까 말이다. 나는 그의 죽음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가 좀 더 자신을 위해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자신이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닫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그의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알 수 없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죽음을 불명확하게 처리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오로지 개인적인 죽음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는 왜 죽었는가? 혹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모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런 아이에게 부모는, 가족은, 학교는, 사회는 그를 어떻게 하는가? 아이를 이끌어주어야 하는 어른들은 그 아이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모두가 다 똑같은 길, 미리 정해진 길, 안전한 길만 가라고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 아이에게 좋은 길일까?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모두가 생각하는 그 길로만 아이를 이끈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길이 아이가 진정 원하는 길인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아이는 그저 교육이 필요한 미성숙한 존재일뿐, 하나의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모든 아이를 획일적인 길로 이끌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비극적인 결과가 바로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 기벤라트가 아닐까? 그는 나약하고 개별적인 인간이면서 하나의 보편적인 상징인 것이다.


소설이 어떤 외부적이고 거대한 힘에 의해 짓눌리는 한스의 상황처럼 시종일관 답답한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예민한 영혼을 뒤흔드는 작품'이라는 찬사에 맞게, 한스가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외부적인 현상들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한다. 특히 한스가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하러 나가거나,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을 말하거나, 감탄할만한 자연을 묘사한 부분이 그러하다. 하지만 자신이 자연을 통해 느꼈던 경외나 찬탄도 결국 자신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신학교에서 만났던,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헤르만 하일너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 마치 파도에 휩쓸리듯(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외부적인 힘에 휩쓸려버렸다. 이 책의 제목처럼 '수레바퀴 아래' 깔려버린 것이다. 그 힘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컸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떤 잔잔한 슬픔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나를 감싸는 이 슬픔 또한 백 년 전에도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위안은 잠시 내 곁에 머물다 사라졌다. 나는 더 큰 슬픔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헤어나오지 못할 수렁으로 빠져버린 듯, 거대한 수레바퀴가 수렁 위에서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듯 나는 가슴이 답답했고, 답답하다 못해 아팠다. 나는 내 유년시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절 내가 느꼈던 감정의 정체가 이 소설을 통해서 해명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시절을 무사히 지나왔는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이유다.


문득 한스의 친구였던 헤르만 하일너의 삶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