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편혜영, 『밤이 지나간다』, 창비, 2013.

시월의숲 2015. 4. 13. 15:16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딱히 털어놓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들 몰래 간직해온 비밀이나 이사를 할 때마다 잊지 않고 챙겨온 편지 상자 같은 건 없었다. 남편 몰래 누군가에게 받은 반지도 없고 그런 것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아무리 되돌아봐도 일생을 통틀어 지킬 만한 비밀이 없는 시시한 인생이라는 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고 기회가 있을 때면 자주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비밀을 유지하는 게 그녀를 한층 더 외롭고 쓸쓸하게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품고 있다는 것에, 자신이 아들의 인생을 모르는 만큼 아들 역시 그녀의 비밀을 영영 모른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야행」, 19쪽)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을 한층 더 외롭고 쓸쓸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비밀을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 어느 책에선가, 비밀을 가짐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된다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는 커가면서 자연스레 비밀을 가지게 되지만, 어떤 이들은 일생을 통틀어 지킬 만한 비밀이 없는 인생을 살기도 한다. 비밀이 없는 삶을 곧 시시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어떤 이들은 '시시한 인생'을 간절히 바랄 수도 있지 않은가? 비밀은 폭로되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두려움과 불안을 유발하며, 비밀을 가진 자는 평생을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킬 만한' 비밀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것을 위해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비밀 ― 비밀이 없다는 비밀 ― 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그 비밀이 지킬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둘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편혜영의 『밤이 지나간다』는 그런 비밀에 대한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어떤 것은 '지킬 만한'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반대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아니,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지킬 만한 비밀과 그렇지 않은 비밀을 엄밀히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새벽의 어스름과 저녁의 어스름처럼 구분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에게는 지킬 만한 비밀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밤에 가까운 비밀과 새벽에 가까운 비밀 사이의 미묘한 차이는 존재한다. 편혜영은 아직 밤에 가까운 비밀을 말하는데 더 익숙하고 어울리는 것 같지만, 새벽을 짐작케하는 비밀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전자의 경우는 「야행」, 「밤의 마침」 「비밀의 호의」, 「개들의 예감」, 「블랙 아웃」, 후자의 경우는 「해물 1킬로그램」, 「서쪽으로 4센티미터」, 「가장 처음의 일」이 해당될 것이다.

 

「야행」에는 비밀이 없다는 것이 비밀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녀는 재개발로 인해 곧 허물어질 아파트에서 아들이 자신을 데리러 와주기를 기다리며 짐을 싸고 있다. 그러던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내의 돌연한 방문을 받는다. 전기가 나가 어두운 아파트에 등장한 낯선 사내는 누구인가? 재개발되는 아파트에서 쫓아내기 위해 건물주가 고용한 용역회사 직원인가? 아니면 그의 아들인가? 나는 낯선 사내의 등장이 삶의 비밀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녀는 평생 지킬 만한 비밀 없이 시시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지만, 삶의 비밀은 곧곧에 포진해 있고, 그것은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한당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밤의 마침」에서 주인공이 받은 수신자를 알 수 없는 엽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수신인은 알 수 없지만, 마치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은 엽서의 내용 때문에 예전에 자신이 성추행을 한 소녀를 찾아간다. 비밀은 그렇게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쑥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비밀을 가진 자를 농락하기도 한다. 「개들의 예감」또한 그러하다. 주인공은 자신이 개를 키우고 있음에도 윗층에서 개를 키우고 있다고 상상하며, 급기야는 개가 죽었다는 생각에 신고까지 하게 된다. 그의 비밀은 바로 자기 자신의 상상에서 비롯된다.

 

그렇다고 비밀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장 처음의 일」은 비밀로 인해 행운이 찾아오고 급기야는 사랑을 고백하기에 이른 한 사내를 그리고 있다. 「서쪽으로 4센티미터」의 경우도, 고속도로를 왕복 운행하며 구조물을 관리하는 주인공이,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홀연히 사라진 한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삶이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해물 1킬로그램」은 자식을 잃은 주인공이 자신과 처지가 같은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인간이 가진 감정이란, 그것이 얼마나 강렬한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 지속되는 것은 삶 그 자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가진 비밀이 어느 순간에는 전혀 비밀이 아닐 수도 있음을 소설은 폭로한다. 그러한 순간은 전혀 엉뚱한 사건, 예를 들면 '돌연한 웃음' 같은 것에서 촉발되기도 한다.


삶은 드러내고 있는 것보다 감추고 있는 것이 많고, 우리는 그러한 삶의 극히 적은 부분만을 살다 갈 뿐이므로 어쩌면 비밀이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비밀은 '돌연성', '우연성', '뜻밖의 계기' 등에 의해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한순간도 자신의 본 모습을 전부 드러내보이지않는다. 비밀이 자신의 본 모습을 전부 드러낸다면 그것은 더이상 비밀이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킬 만한 비밀이 없다고, 비밀이 없음을 비밀로 하여 스스로를 외로움과 쓸쓸함 속에 던져넣을 필요는 없다. 비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비밀을 느껴보지 못한 것 뿐이니까. 굳이 무언가를 탓해야 한다면, 비밀이 없음을 탓할 것이 아니라, 비밀을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제 맨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갈 때인 것 같다. 우리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을 한층 더 외롭고 쓸쓸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밀을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삶을 조금 알게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고 싶어서가 아닐까? 어차피 해답이 없는 게 삶이라면, 삶의 비밀 하나쯤 공유함으로써(그렇게 착각함으로써) 삶을 살아나갈 이유를 스스로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은 아닌가?


세상의 모든 비밀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그러한 비밀을 간직한 채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저기, 수많은 개별적인 밤들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