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존 버거,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열화당, 2005.

시월의숲 2014. 12. 28. 14:10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이 책이, 제목처럼 사진과 관련된 이야기인줄 알았다. 그러니까 어떤 하나의 사진이 있고, 그 사진에 얽힌, 그 사진 속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인상적인 사진들도 많이 들어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내 이런 기대는 서점에서 이 책을 먼저 보았더라면 아마도 하지 않았거나, 기대가 빗나갓음을 미리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인터넷 서점을 통해 구입했고, 택배 상자를 뜯고 책을 꺼내 보기 전까지도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사진은 맨 처음 <자두나무 곁의 두 사람>이란 제목의 글에 실린 딱 한 장이 전부다. 물론 내가 기대했던 것은 사진이 전부가 아니지만, 사진이 거의 없는 경우 또한 내가 기대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제목을 '글로 쓴 사진(포토카피)'이라고 명명한 작가의 의도를 내가 오해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묘한 감정이 책을 읽는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배신감(?)이었을까? 하지만 '사진'이라는 단어의 뜻을 내가 너무 편협하게 해석한 것일뿐이지 않은가?

 

나는 사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사진이란 어떤 한 순간을 포착하여 잡아두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거기에 찍힌 인물들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때로 사진 그 자체로 감동을 느낄수도 있다. 그것은 기억 혹은 더 나아가 추억을 환기시킨다. 우리는 기억하거나 추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반면 기억하거나 추억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사진은 글보다 가시적이며 즉각적이고 손에 잡힐듯 선명하다. 존 버거는 사진의 그러한 속성을 글에 끌어들여, 자신이 인상깊게 느꼈던 여러 인물을, 그가 처한 상황을, 나아가 역사의 단면을 글로써 그려낸다. 그는 글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린다. 마치 사진작가가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자신에게 감흥을 준 장면을 찍는 것처럼. 그가 글로 찍은 장면들은 모두 그와 만났던 인물이거나 그가 보았던 장소이다. 그러므로 글의 바탕이 되는 사진이 실제로 존재하느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사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가 느낀 감정 혹은 이야기의 여부일테니까.

 

실제의 사진과 존 버거의 '포토카피'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상상력일 것이다. 존 버거의 '포토카피'를 읽고 있으면 당연하게도 그가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 없으니 글을 통해 상상할 수밖에. 그가 의도한 것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보다 생생하게, 손에 잡힐듯 그려져 있는 그의 포토카피를 읽고 있으면,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무척이나 특별하게 느껴진다. 반대로 철학자 시몬 베유의 포토카피를 읽고 있으면 우리네 인생과 별반 다를바가 없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의 글 속의 인물들은 특별함을 찾지 않아도 특별하게 느껴지고, 남과 다른 삶을 산 인물이라도 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의 글 속의 인물들은 누구 하나 하찮거나 위대할 것 없이 공평하다. 그래서 모두 아름답다. 그는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에 대해서 쓴 포토카피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사진은 끝없는 응시로부터 나오는 무의식적인 영감이다. 사진은 순간과 영원을 붙든다.' 이건 그의 말이 아니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한 말을 그가 인용한 것이지만, 그의 '글로 쓴 사진' 또한 그 문장에 다가가고 싶은 열망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과 영원을 붙들어 놓을 글에 대한 열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