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문학동네, 2013.

시월의숲 2015. 2. 2. 00:08

 


모두 열한 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재작년에 나온 책이고, 나오자마자 책을 구매했지만, 최근에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동안 다른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김연수에 대한 흥미가 식은 것도 아니건만, 어쩐지 책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김연수의 책을 꼬박꼬박 읽고 있긴 한데(물론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많다), 배수아처럼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은 좀 덜하다. 하지만 김연수의 소설은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있고, 나는 그것을 잊지 못해 그의 소설을 찾아서 읽는 것이리라. 그 '나름의 매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콕 집어서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릴 테지만.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할까. 김연수만이 가진 고유한 매력이란. 특유의 따스함? 절망 속에서도 결코 유머를 잃지 않는 여유? 한 개인의 역사와 사회의 역사에 대한 해박함? 화자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하다가 결국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식의 서술 방식? 그 모든 것들이 될 수 있겠지만, 이번 소설집에서 두드러지게 느꼈던 것은 '김연수식' 유머였다.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그 유머는 때로 말장난 같기도 해서, 한쪽이 진지한 경우 꽤 민망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민망하면 민망한 대로 그는 그것을 교묘하게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처한 상황이 꽤 심각하고, 절망적이며, 두려운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웃을 수 있으며, 웃음으로써 그것을 넘어서거나 혹은 넘어서지 못하더라도 한 발 뒤에 서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더더욱.

 

인간과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마냥 아름다울 수만은 없다. 그리고 실은 그것이 잔인하고, 끔찍하며, 시궁창같이 더럽고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일 수 있다. 인간에게 절망과 희망이 있다면, 나는 아직 절망 쪽에 더 가까운 것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전혀 배우지 않으며, 역사는 아무런 쓸모가 없고, 작은 유혹에도 쉽게 넘어가며, 단순한 쾌락만을 좇고, 쉽게 망각하며 그러므로 쉽게 타락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그런데 아름다움이라니. 도대체 무슨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랑? 오,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들의 사랑 말인가?

 

내 이런 냉소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열한 편의 소설 속에 담긴 개별적인 사랑의 역사를 읽다 보면, 때로 웃음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듯, 그렇게 저 깊은 곳에서 어떤 감정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거센 파도가 아닌,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의 잔잔한 파도가 내는 아련한 소리를. 그는 알고 있다. 바다가 품고 있는 다층적인 소리를. 그리고 그는 믿고 있다. 그 소리 중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위로를 줄 수도 있음을. 어떤 슬픔은 아름다울 수도 있음을.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에 그는 이렇게 썼다.

 

'소설을 쓴다는 건 그게 야즈드의 불빛이라고 믿으며 어두운 도로를 따라 환한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는 일과 같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을 쓰는 동안,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은 무조건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 이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 곳이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끔찍하든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쓰는 소설에 어떤 진실이 있다면, 그건 그날 저녁, 여행에 지친 우리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야즈드의 불빛이라 생각했던, 지평선을 가득 메운 그 반짝임 같은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머나먼 지평선의 반짝임을 바라보며 천천히 나아가는 시간들이라고. 그게 야즈드의 불빛이라서, 혹은 야즈드의 불빛이 아니라고 해도(340~3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