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시월의숲 2015. 4. 24. 22:37

나무에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다. 특히 이맘때의 나무에는 적어도 내 마음을 훔치는 무언가가 있다. 더위에 지쳐 축축 처지는 짙은 녹색의 여름 나무와, 화려함과 쓸쓸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가을의 나무와,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아 스산한 겨울의 나무에는 없는, 연둣빛의 새순이 막 터져 나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햇살을 한가득 안은 나무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함이 봄의 나무들에는 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마음이 설렌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한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 나무가 있었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잎사귀에 내려앉은 햇살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며 조각조각 부서졌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잎사귀와 그렇지 않은 잎사귀가 어울려 만들어내는 음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한때 저것을 그리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진정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무엇을 위해 살고자 했는지. 그것은 사실 그리 오래전의 일도 아니지만, 이미 너무나 오래된 과거의 일처럼 아득하다. 흔들리는 나무에 내 마음이 따라 흔들리는 것은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기억을 나무가 상기시켜주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몸이 이미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 왔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나는 다시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바람과 나무가 만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해독할 수 없는 소리. 해독할 수 없는 명암. 해독할 수 없는 흔들림. 특별함은 바로 그 '알 수 없음'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대부분 아는 것이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바라보고 귀기울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어떤 이들은  (0) 2015.05.05
웃기지 않은 농담  (0) 2015.04.29
따사로운 햇살과 연둣빛 바람  (0) 2015.04.22
벚꽃통신  (0) 2015.04.09
이해할 필요도 없고 딱히 이해 못할 것도 없는  (0) 201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