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애처로운 사랑노래

시월의숲 2015. 5. 22. 00:22

그는 대부분 아는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알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였다. 누군가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상대방이 하는 말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메곤 했다. 그는 사랑에 대해 수없이 많은 말을 듣고, 수없이 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수없이 많은 책을 읽었지만, 사랑에 대해서 알기는 커녕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가 그런 생각을 누군가에게 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대며 그에게 일장 연설을 퍼부었다. 사랑이란 원래 알 수 없는거야. 그건 그냥 끌리는 마음이야. 누군가가 자꾸 생각나고 챙겨주고 싶고, 목소리를 듣고 싶고, 만나고 싶어지는 거야. 그 앞에 서면 말문이 막힌다거나 얼굴이 붉어지고, 갑작스럽게 음성이 높아지는가하면, 불필요한 말을 수다스럽게 하기도 하고 쓸데없이 과묵해지기도 하지. 사랑이란 열병같은 거야. 어떤 이는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건 호르몬의 미친 작용일 뿐이야. 예로부터 내려오는 종족보존의 본능 때문이지.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사랑을 한 번도 못해봤구나. 사랑이란 익숙함이고 편안함이야. 누군갈 자꾸 만나다보면 자연스레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게 마련이지. 첫눈에 끌리지는 않더라도 말이야. 첫눈에 반하는 사람은 없어. 아직도 그런 걸 생각하는거야? 너는 어쩔 수 없는 로맨티스트인거야? 아직 풋내기로구나. 사랑은 기다리는게 아니야. 용기있게 쟁취하는 거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 모르니? 마음의 문을 열고 네가 먼저 손을 내밀어 봐. 사랑을 책이나 영화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현실에서 찾으라고! 심지어 어떤 이는 그가 분명 유년시절에 어떤 트라우마를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말들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게 다 사랑이라는 말인가? 모두 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어느 것 하나 완벽하지 않았다. 더구나 종족보존의 본능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분명히 존재하는 동성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던가? 그는 다시 맨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랑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아는' 것은 다름을. 사람들은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말을 하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알지' 못한채로 사랑을 '한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최소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도 그것을 할 수 있는, 다시 말해, 그것에 빠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해야한다. 그러니까 사랑에 대해 무지한 채로 우리는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 사랑에서 빠져나온 뒤에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지 말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모두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짐작'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을 둘러싼 것, 사랑의 잔해일 뿐인가? 그러니까 사랑으로부터 떨어져나온 껍데기 혹은 파편 같은 것? 그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갑자기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에 '빠지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을 알고 싶으면 사랑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사랑을 할 줄 몰랐고, 사랑에 빠지는 것 또한 알지 못했다. 그는 점차 한가지 확신을 하게 되었다. 사랑이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는 그렇게도 많은 사랑에 대한 담론이 떠도는 것이라고.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에는 그렇게나 많은 사랑노래들이 존재하고 앞으로도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랑노래들이 애처로운 이유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 노래들은 하나같이 '나는 사랑을 몰라요!'라고 외치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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