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더위와 잠 그리고 꿈

시월의숲 2015. 7. 26. 21:17

두터운 시멘트 건물 벽면과 육중한 철제와 거대한 유리 시설물, 대지 전체를 뒤덮은 뜨거운 아스팔트에서는 이글거리는 화장장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드러난 살과 피부, 눈동자와 털과 같은 온갖 동물성 유기물들이 땀과 함께 열기에 연소되면서 거리는 온통 분화구처럼 움푹한 화염의 구덩이로 변했다. 어느 방향으로 얼굴을 돌려도 수천 개의 불화살이 눈과 피부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혔다. 수천 개의 별들이 동시에 폭발했다. 유성들이 불타고 가스가 연소하며 어두운 재가 천체의 궁륭에 달라붙었다. 모든 빛이 차단되었다. 밤이 발생했다. 그러나 더위는 물러가지 않았다. 육체의 조직과 조직을 이어주는 점성질의 섬유들은 밤이면 더욱 느슨하게 이완되었고 흐느적거리며 의식의 가장자리를 맴돌았다. 잠의 세포는 아이덴티티를 잃었다. 정체성의 암호가 풀렸다. 잠의 세포막이 와해되면서 혼수와 꿈이 뒤섞였다. 그것은 일 년 중 가장 엷고 희박하며 확장된 잠의 시기였다. 그에 반해서 비중과 농도가 가장 강렬해진 꿈의 콜로이드가 지배하는 시기였다.(23~24쪽, 배수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자음과모음, 2013.)


*

더위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길을 걸을 때면 물속을 유영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하지만 내가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은 팔월이 아니고, 칠월도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 며칠 장마전선으로 인해 고온다습한 기후 속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 머릿속은 더위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런 내 당연한 의지와는 달리, 더위에 관한 생각만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잠을 자기 힘들 정도는 아니다. 아직 모든 창문을 다 열어놓지도 않았다. 선풍기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만하다. 진정 더울 때는 더위에 관한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더위 때문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 되면, '잠의 세포막이 와해되면서 혼수와 꿈이 뒤섞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일 년 중 가장 엷고 희박하며 확장된 잠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비중과 농도가 가장 강렬해진 꿈의 콜로이드'를 언어로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더위와 잠, 그리고 꿈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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