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자유

시월의숲 2015. 12. 8. 20:19

자유란 고립에의 가능성이다. 만약 네가 다른 인간들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면, 네가 그들을 가까이 해야만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면, 돈이나 군중심리, 사랑, 명예, 호기심 등 침묵과 고독 속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요소들을 갖고 있지 않다면 너는 자유다. 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너는 노예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정신적이고 영적인 위대함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다. 고상하고 영리한 인간일 수는 있지만,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네가 이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의 태어남 자체가 운명의 비극이다. 슬퍼하라, 삶의 강요로 인해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면, 슬퍼하라, 자유롭게 태어났고 홀로 살아갈 능력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곤궁한 상황이 너를 타인들과의 삶으로 몰아넣는다면, 이것이 바로 너의 비극이다. 비극이 일생 동안 너의 뒤를 밟는다.(486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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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유로울수록 혼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혹은 혼자일수록 자유로운 것일까. 인간들과 가까이 하면 할수록 인간들에게 얽매이게 되고 결국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페소아는 자유를 '고립에의 가능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소설이나 시는 인간들 속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자유 속에서 나오는 것인가. 언젠가, 소설을 쓰고 싶다면 도시로 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도시에서의 삶,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는 삶 속에 또한 그만큼의 사연들이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글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한 그는 자유롭지 못한 인간일까. 아니다. 이렇게 말해서는 안된다. 나는 너무나 일차원적으로 페소아의 말을 이해한 것 같다. 사람들 속에 있다고 자유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야 함을, 페소아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사람들을 떠나 홀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서 지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서도 정신만은 홀로 명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정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노예로 살지 말라는 것. 어쩔 수 없이 고독한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진정 홀로됨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찌감치 그것을 받아들이고 초연해야 함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 자발적인 고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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