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무의미함에 대해 쓴다

시월의숲 2016. 1. 12. 00:25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른채,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고갤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지만 미묘하게 달라져 있는 풍경들, 사물들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이 때로 너무나도 믿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는 이내, 내가 지금 무얼하고 있는 건가, 급격한 고민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아주 적은 분량의 일기라도 기록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 고민은 더 심해진다. 반드시 무언가를 기록해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무언가를 쓸 때만이 내가 나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일까. 무언가를 쓸 때만이 비로소 내가 '생각'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일까. 언제부턴가 그런 기분이 든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 나날들은 헛되고, 헛되다고. 무언가를 쓴다고 해서 소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세상에서 아무 소용 없는 짓을 하는 것이 그나마 인간적인 일이 아나겠냐고. 이것은 어쩌면 내가 나에게 건네는 말이다. 나와 내가 하는 대화다. 요 며칠간은 조용히 앉아서 내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상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내가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언젠가 봤던 앙상한 나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 무리지어 날아가는 새, 거리에 가득한 자동차들과 누군가 건넨 한마디 인사,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중학생의 얼굴과 책에 나오는 한 마디 문장 같은 것. 그런 모든 것들 속에 내게 감흥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한 가지라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는 나날들은 두렵다.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나날들은 슬프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나날들은 더 슬프다.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무의미할지라도, 무의미함으로써 그 무의미함에 대해 써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 환멸과 부조리로 가득한 삶을 견디는 방식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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