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김영하, 『말하다』, 문학동네, 2015.

시월의숲 2016. 1. 16. 18:26



독자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 소통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소설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아요. 소설을 쓰는 동안에 저는 오직 제 소설과 소통을 합니다. 제가 창조한 세계에서 그 인물들과 대화하면서 사건들을 함께 겪어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이 완성되었다고 생각하면, 저는 나오는 거죠. 이제 그 공간에는 제가 아니라 독자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소설과 독자 간의 소통이 시작됩니다. 거기 제 자리는 없습니다. 이처럼 소통이란 게 상당히 간접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우리 교과서에는 어떤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묻는 것 말이죠. 저는 제 인물들과 소통을 하고 나면, 퇴장을 하는 사람이에요. 독자는 작가가 사라진 자리에서 그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죠.(162~1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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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나서, 어쩌면 나도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찾는 데만 정신을 쏟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소설을 읽고나서 그에 대한 느낌을 기록할 때, 소설의 인물들이 나에게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가가 아니라, 그 인물을 창조한 작가가 의도한 바는 무엇이었을까를 찾는데 더 급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늘 내가 쓴 감상문에는 '어쩌면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니었을까?'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잘못된 독법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하나의 소설은 그것을 쓴 작가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니까.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건 어쩌면 내가 소설가가 아니므로 당연히 알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소설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자신의 의지대로만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마치 부모가 그들의 자식을 자기 생각대로만 키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작가에 의해 탄생한 인물은 그 이후, 소설이라는 세계 안에서 그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며, 작가는 그것을 그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그 인물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이끌어갈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도달한 곳이 처음에 작가가 의도한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일지라도, 그것은 그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한 것이다. 오로지 소설을 쓰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고, 비로소 알 수 있는 사실. 나는 그것을 김영하의 글을 통해 읽으면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독자는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작가와 만나는 것이니까. 독자와 작가의 중간에 책이 놓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도 말했듯이 굉장히 간접적인 소통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와 작가가 소설을 통해서 소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의 생각은 또한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그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다' 고.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의미와 기억, 색채로 읽힐 수 있을 것이라는 의지. 그것은 다른 어떤 종류의 책보다도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고유의 매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 대입해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을 보려 하지, 그 사람의 부모가 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먼저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물론 소설 속 인물들과 작가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한 소설이라는 것도 인물이나 사건 중심이냐, 혹은 심리나 내면, 분위기나 스타일, 이미지 중심이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