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헤르만 헤세, 『헤세가 사랑한 순간들』, 을유문화사, 2015.

시월의숲 2016. 3. 21. 00:23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적어도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책장에 꽂힌 책들의 제목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할아버지 집에 있던 책장의 거의 모든 책들은 고모의 것이었는데,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꽂혀 있었지만 주로 철학 서적과 소설책들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종이로 씌워진 책등에 볼펜으로 멋들어지게 제목을 써놓았고, 나는 할아버지의 필체로 쓰여진 책들의 제목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오로지 제목만으로 상상해보는 것을 즐겼다. 그렇게 바라보던 책 중에 헤세의 '데미안'이나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 같은 소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헤르만 헤세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의 소설들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급기야 '유리알 유희'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소설을 읽어보리라 다짐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유리알 유희'라는 제목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그 소설을 읽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소설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깨알처럼 박혀 있던 책의 글자들을 읽을 때면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기 때문에 얼마 못 가서 몇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헤르만 헤세는 내게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만 늘어놓는 작가로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적어도 '데미안'을 읽기 전까지는.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나서야 겨우 헤르만 헤세를 계속 읽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던 순간, 배수아가 번역하고 엮은 '헤세가 사랑한 순간들'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배수아가 쓴 소설뿐만 아니라 그가 번역한 책들까지 모두 읽기를 원하는 나에게 헤세의 이 선집은 정말 선물처럼 느껴졌다. 배수아가 헤세를 번역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 의외로 다가오기도 했지만(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의외였는지 설명하자면 생각을 좀 더 정리해야겠지만), 내가 읽었던 헤세가 배수아의 번역을 통해서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가 가장 궁금했다.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가 주로 수록된 선집이어서, 헤세를 좀 더 내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과연,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런 내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되는 것을 느낀다. 어렸을 적 아리송한 제목으로 먼저 다가왔던 헤세의 작품과 생각들이 어느 정도 구체적인 형상 혹은 질감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배수아가 말한 '헤세적'이라는 것의 특징이 무엇인지, 무엇이 '헤세적'인 것인지. 제발트와 카프카도 그러했지만, 헤세도 배수아로 인해 비로소 내 안에 새롭게 각인되었다고 해야 하리라.

 

이 책에 실린 모든 에세이와 소설(부분적으로 발췌한)이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책의 초반에 실려 있는 '발코니 여인'과 뒷부분에 실려 있는 '나무'라는 에세이다. '발코니의 여인'은 마치 짧은 소설을 읽는듯, 헤세의 유머러스함과 남녀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잘 표현된 작품이고, '나무'는 그가 가진 자연에의 찬미와 묘사가 무척 아름답게 표현된 에세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배수아가 번역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가 쓴 후기가, 그가 번역한 작가의 작품보다도 더 기대되었는데,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품을 번역한 사람의 후기는 단순히 작가의 작품과 연대를 건조하게 나열하거나, 의무감으로 인한 기계적인 칭송인 경우가 많지만, 배수아의 후기는 자신이 무엇에 그토록 매혹되었는지에 대해서 그 자신만의 매력적인 문체로 무척이나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헤세의 선집에 실린 후기는 제발트의 '현기증. 감정들'에 실린 후기나 베른하르트의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혹은 카프카의 '꿈'에 실린 후기보다는 다소 침착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배수아라는 작가이자 번역가가 스스로 번역하고 엮은 '헤세가 사랑한 순간들'이지만, 다시 말하자면 배수아에 의해 탄생된, '배수아가 사랑한 순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다시 책의 제목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인상 깊었던 것이 하나 더 있다. 헤세가 노벨상을 받은 이후, 그의 집 울타리에 와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는 고대 중국의 시를 적어서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헤세의 모든 글이 좋지만, 나는 헤세가 붙여 놓았다고 하는 고대 중국의 시 또한 무척 인상적이었다. 과연 헤세라면,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자연을 찬미하며, 고요와 고독 속으로, 그가 그토록 바라던 무위 속으로 걸어들어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라면, 그런 글을 문 앞에 붙여놓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는 그 시가 단순히 자신의 울타리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정중히 돌려보내기 위한 문학적인 거절의 표시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겪어온 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선언은 자신이 이룩한 것에 대한, 단호하면서도 겸손한 자부심과 함께 어떤 품위를 지닌다. 이런 일련의 에피소드 자체가 소위 '헤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배수아가 제발트를 읽은 후, '제발트 이전과 이후'가 있을 뿐이라고 했듯이, 헤세를 읽고 나서는 '헤세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한 사람이 늙고, 그의 일을 모두 행하였다면

고요 속에서 죽음과 벗할 순간이 다가왔음이라

그는 더 이상 인간이 그립지 않도다. 그는 인간을 알고, 이미 충분히 보아 왔으니

이제 그리운 것은 오직 고요일 뿐,

그런 사람을 찾아가고, 그런 사람에게 말을 걸며, 그런 사람을 말로

괴롭히는 일은

점잖음이 아니니

그의 집 앞에서는 그냥 조용히 지나가리라

그 누구의 집도 아닌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