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아무 말도 아무것도

시월의숲 2016. 5. 23. 22:12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 무엇이 그토록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동안 나를 지탱했던 미약한 자존감마저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자신감은 커녕 자존감마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갑자기, 길 밖으로 내쳐진 기분이 든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껌뻑이고 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런 의욕도 일지 않는다. 내가 속상한 것은, 그 모든 것들, 그가 말했던 나의 단점들, 내게 부족한 것들을 나또한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도 내가 무엇이 부족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말을 내가 반박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했다.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일만을 대충대충, 건성으로 하고 있다고.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내가 하는 행동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나름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말했다. 네 동기들을 보아라. 다들 가정을 꾸리고 있으면서 일을 저렇게 열정적으로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는 뭔가. 너는 가정도 없으니 신경 쓸 것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일을 그 따위로 처리하는 건가. 나는 그 말이 이렇게 들렸다. 너는 왜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지 않는가. 내가 하는 일이란 내 동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중이나 업무량이 적은 일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말이 불러올 파장을 미리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런 일을 하고 누군가는 저런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하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는가가 아니라, 주어진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할테니까. 그리고 그건 맞는 말이니까.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 나는 그들과 달리 어떻게 일하고 있는가. 그 대화(아니, 일방적인 지시 혹은 힐난이었지만) 이후로 나는 내 내부의 무언가가 툭 부러지는 것을 느꼈다. 내부의 무언가가 심각하게 손상되는 것을 느꼈다. 일부분은 인정하면서도, 일부분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 대화 이후로 나는 더 위축되었고, 활기를 잃었고, 말을 잃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경로를 이탈한 자동차처럼, 어두운 통로에 홀로 서 있다. 차가 맹렬한 속도로 내곁을 지나간다. 혹은 나를 밟고 지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어느푸른저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야 나무야  (0) 2016.05.29
지금 내게 필요한 것  (0) 2016.05.25
절반 이상의 무엇  (0) 2016.05.20
마음이 이끄는 대로  (0) 2016.05.10
망각을 위하여  (0) 2016.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