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나무야 나무야

시월의숲 2016. 5. 29. 23:30




그냥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앉아 잠들고 싶었다. 햇살은 눈부셨고, 하늘을 맑았으며,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 주었다. 나는 조카들과 함께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다. 일곱 살과 다섯 살의 아이들은 운동장에 있는 기구들을 한 번씩 다 타본 뒤, 마지막으로 모래를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그들이 하는 놀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샘솟는 물과 같았다. 모래성을 짓고 또 짓기를 반복하는 것이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일인냥, 모래를 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약간 더웠으나, 이 정도의 더위는 그들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터였다. 나는 플라타너스가 만들어내는 커다란 그늘 아래 앉아서, 플라타너스에 몸을 기댄 채 나무를 올려다 보았다. 오래 전 내가 내 조카들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 아마 나도 누군가와 이 그늘 아래서 저들처럼 모래성을 쌓았을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의 흐름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믿기지 않아 손으로 더듬더듬 나무를 만져보았다. 나무야, 나무야. 너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겠지.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학교를 거쳐간 수많은 아이들의 모래놀이를. 나는 말없이 우리를 굽어보고 있는 저 플라타너스가 마치 구도자나 선지자처럼 느껴져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바람이 불어왔고,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내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당연하게도 나는 아무런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운동장에는 조카들의 웃음소리만이 바람을 따라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