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망각을 위하여

시월의숲 2016. 5. 4.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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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위협적으로 느껴진 적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초등학교 때, 등교를 하다가 세찬 바람에 몸이 휘청거리며 다리가 푹 꺾이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이후로 이렇게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아니,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 그런 경험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닐지 모른다. 어쨌거나 오늘 바람은 실로 위협적이었다. 아무런 형체도 없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꺾이게 하고, 기와를 깨지게 하고, 자동차를 들썩이게 하고, 사람들을 제대로 걷지 못하게 만든다. 그저 피부로만 감지되는 공기의 흐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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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길다면 긴 연휴가 시작된다.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6일을 합치면 무려 4일을 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연휴동안 무얼 할거냐고 묻는다. 나는 반문한다. 꼭 무얼 해야만 하느냐고. 반드시 어딜 가야만 하고, 누군가와 만나야 하며,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고, 재밌는 영화를 봐야하며, 축제에 참가해야만 하는 것이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데도 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안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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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우리는 망각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그리도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연휴가 끝날 때까지 일 걱정만 하고 있다면, 혹은 시간의 흐름을 안타까워만 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것이 또 있을까. 그렇게 시간을 보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쉬는 시간동안 그리도 열심히 누군가를 만나고, 무언가를 보거나 먹으러 다니며, 대화를 하고,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축제에 참가하는 것이다. 시간을 잊음으로써 시간이 주는 참혹함을 견디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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