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우이동

시월의숲 2016. 6. 7. 22:41

예전에 읽었던 배수아의 단편소설 <우이동>이 생각났다. 《훌》이라는 제목의 소설집에 수록된 단편인데, 연휴동안 부산과 통영에 다녀온 뒤, 무언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자 배수아의 그 소설이 생각난 것이다. 오래 전에 읽어서 대략적인 줄거리와 분위기 정도만 머릿속에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기억은 바로 이마를 타고 흐르던 땀의 이미지다. 소설 속에는 가난하고 힘겨운, 삶이 주는 무게에 짓눌린 한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쨌거나 다른 보통의 사람들처럼 살기 위해 주말에 시간을 내어 계곡으로 소풍을 가기로 한다. 때는 여름이어서 더운 와중에 가족 소풍을 가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김밥을 싸고, 돗자리를 챙겨서 몇 시간이나 가야하는 계곡으로 출발하지만, 거리에는 온통 휴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아버지와 엄마, 아들과 딸이 등장하지만, 어쩌면 자식들이 더 있었는지도 모르고,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소풍을 가려고 하는 곳이 계곡이 아닐 수도 있다. 세부적인 스토리가 더 있었던 것 같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대략 그 정도다. 작가는 그들이 악착같이 소풍을 가려고 하는 모습과 그것을 방해라도 하듯 이글거리는 뙤약볕의 이미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면서, 소설을 읽고 있는 내내 땀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든다. 이마와 겨드랑이, 사타구니를 타고 흐르는 끈질기고 끈적끈적한 땀. 왜 그들은 그렇게도 고통스러워하면서도(혹은 고통스러운줄도 모르고) 그렇게 가족 소풍을 가려고 하는가. 물론 그들이 하려고 하는 소풍과 내가 다녀온 부산과 통영에서 본(겪은) 이미지가 꼭 일치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소풍은 남들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나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 간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과 통영에 가기 위해 각각 왕복 여섯 시간이 넘도록 차를 타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착한 목적지에서 나는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으며, 오로지 차를 타기 위한, 차가 유일의 목적인 것처럼 되어 버린 여행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미약한 구토감과 한없는 피로밖에 없었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서도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나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양 손에 들린 자신의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면서도, 거의 한나절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면서까지 공룡 박물관에 가고 모터쇼에 가며 해운대며 동피랑에 간다.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짧음을 한탄하듯이 그들은 서둘러 사진을 찍고, 대기표를 받아 기다린 후 음식을 사 먹는다. 그 모든 행위들이 나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내가 바란 것은 그저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곳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가벼운 산책을 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에 앉아 약간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 하고, 책을 읽는 것이 전부였는데. 나는 그들이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연휴에는 어딘가를 반드시 가야하고, 무언가를 반드시 먹어야 하며, 어떤 것을 반드시 봐야만 한다고. 휴가를 위한 휴가, 사진을 위한 사진, 관람을 위한 관람, 결국 여행을 위한 여행. 나는 왜 그들이 진정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지 의아했다. 내 어딘가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삐딱하게만 보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어쨌거나 사람들로 가득찬 거리를 걷고 있으니, <우이동>의 이미지가 생각나는 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이동>의 인물들에게 남은 것은 결국 무엇인가. 이글거리는 태양을 향한 살의(殺意)와 멈출 줄 모르고 흐르는 끈질기고 끈적한 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