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한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알고보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관계

시월의숲 2016. 6. 20. 00:29

1.

네, 그동안 몇 편의 영화를 보고,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것에 대해 한 줄도 쓰지 못했습니다. 분명 그것들은 내 마음에 미세하게나마 파문을 일으켰지만, 그것의 무늬를 그려내는 일이 어쩐지 성가시다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냉장고의 식재료가 떨어져가는데도 마트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라면을 버리고, 카레나 씨리얼의 유통기한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습기 때문인지 쌀에 미세한 곰팡이가 피었습니다. 기온은 올라가고 장미는 이미 떨어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그늘에 있으면 내리쬐는 태양볕도 그럭저럭 견딜만 합니다. 아직은 나무의 푸르름이 지쳐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 곧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겨워지는 날들이 오겠지요.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땀이 비오듯 흐르고, 뜨거운 열기에 머리가 마비되는 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쩔 수 있나요.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수밖에. 유통기한이 지난 것, 상한 것은 버리고 신선한 것들로 냉장고를 채워넣는 수밖에. 그렇게 끊임없이 비우고 채워넣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2.

며칠 전에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출근을 해서 막 업무를 시작하려던 참이었지요. 아침부터 아버지가 전화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전화를 받으면서도 무슨 일인가 의아했어요. 아버지는 술이 덜 깬 목소리로 돈을 부쳐줄 수 있냐고 묻더군요. 누구한테 돈을 빌렸다고 하면서요. 나는 차오르는 궁금증을 밑바닥으로 가만히 누르고, 알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혹 말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굳이 캐묻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 나는 아주 잠시,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시고, 엄마라 부르던 사람이 존재했었던 그때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어요.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아버지도, 나도 서로 그때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건, 지금 좀 민망한 일이 되었지요. 걱정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3.

아버지를 보면서, 남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한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알고보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관계, 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세상에는 그런 관계들로 가득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남들이 봐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관계', 보다는 '남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한 관계일지도 모르지만 알고보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관계'가 오히려 더 일반적일지 모른다는 생각. 아니, 일반적이지 않아도 상관없겠지요.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당당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세상은 이미 그런 '이상한' 것들로 가득하니, 더이상 이상할 것도 없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조금씩 다 이상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이상한 세상에서 이상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살을 맞대며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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