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2016.

시월의숲 2016. 6. 12. 22:23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로 그런 불필요한 면, 멀리 에둘러 가는 점에 진실, 진리가 잔뜩 잠재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어쩐지 강변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소설가는 대체로 그렇게 믿고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설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다'라는 의견이 있어도 당연한 것이고, 그와 동시에 '이 세상에는 반드시 소설이 필요하다'라는 의견도 당연합니다. 그건 각자 염두해 둔 시간의 스팬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효율성 떨어지는 우회하기와 효율성 뛰어난 기민함이 앞면과 뒷면이 되어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중층적으로 성립합니다. 그중 어느 쪽이 빠져도(혹은 압도적인 열세여도) 세계는 필시 일그러진 것이 되고 맙니다.(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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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만일 당신이 뭔가 자유롭게 표현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것보다 오히려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원래 어떤 것인가'를, 그런 본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라는 문제를 정면에서 곧이곧대로 파고들면 얘기는 불가피하게 무거워집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야기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자유로움은 멀어져가고 풋워크는 둔해집니다. 풋워크가 둔해지면 문장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힘이 없는 문장은 사람을―혹은 자기 자신까지도―끌어들일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하면 '뭔가를 추구하지 않는 나 자신'은 나비처럼 가벼워서 하늘하늘 자유롭습니다. 손바닥을 펼쳐 그 나비를 자유롭게 날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문장도 쭉쭉 커나갑니다. 생각해보면, 굳이 자기표현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사람은 보통으로, 당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뭔가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자연스러운 문맥 속에서 우리는 의외로 자신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110~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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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낼리티'라는 말을 할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십 대 초의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내 방,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 앞에 앉아 난생처음으로 비치 보이스를 듣고 비틀스를 듣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파르르 떨리면서 '아아, 이렇게 멋진 음악이 있다니. 이런 울림은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음악은 내 영혼의 새 창을 열고 그 창으로는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공기가 밀려듭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행복한, 그리고 한없이 자연스러운 고양감입니다. 다양한 현실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내 몸이 지상에서 몇 센티미터를 붕 떠오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것이 나로서는 '오리지낼리티'라는 것의 합당한 모습입니다. 매우 단순하게.(112~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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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면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십시오라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갖고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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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에나 물론 합의라는 건 필요합니다. 그게 없어서는 사회는 성립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합의에서 얼마간 벗어난 곳에 자리한 비교적 소수파의 '예외'도 그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혹은 분명하게 시야에 넣어야 합니다. 성숙한 사회에서는 그런 균형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런 균형을 어떻게 잡아나가느냐에 따라 사회에 폭과 깊이와 내성이 생겨납니다.(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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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교교육에 바라는 것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이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도 아니고 교육 설비도 아닙니다. 더더구나 정부나 지자체의 교육 방침 같은 건 결코 아닙니다. 아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가 있고 그 한편에는 달리기를 별로 잘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는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이 있고 그 한편에는 상상력이 별로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는하지만 아마도 다른 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할아이들이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것이 사회입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주자'라는 것이 하나의 정해진 '목표'가 되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또 일이 이상해질 것 같습니다.

내가 학교에 바라는 것은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의 상상력을 압살하지 말아달라'는 단지 그것뿐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하나하나의 개성에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를 부여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학교는 좀 더 충실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병행해 사회 자체도 좀 더 충실하고 자유로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229~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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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공유했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아마도 이야기라는 개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스토리라는 것은 인간의 영혼 밑바닥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 빝바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과 사람을 근간에서부터 서로 이어줍니다.(325~3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