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한강, 《흰》, 난다, 2016.

시월의숲 2016. 9. 14. 15:25

왜 흰 새가 다른 색의 새와는 다른 감동을 주는 것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왜 특별히 아름답게, 기품 있게, 때로 거의 신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는 이따금 흰 새가 날아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흰 새는 아주 가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햇빛에 깃털들을 빛내며 날아간다.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허공을 활공한다. 눈부신 두 날개를 활짝 펼치고.(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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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본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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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성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1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