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삶의 경악

시월의숲 2016. 11. 6. 17:11

모순의 문장으로 사고하면서 소리가 아닌 소리로, 색채가 아닌 색채로 말한다. 우리가 의식을 갖지 않을 의식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인 것은 우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해가 불가능한 그 내용을 이해한다. 그 역시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두를 사물의 영적인 측면,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차원의 숨겨진 역설의 의미로 해명한다. 하지만 그 해명에 지나친 믿음을 부여하여 해명 자체를 포기해버리지는 않는다.…

모든 말의 꿈을 허망한 침묵 속에 조각한다. 어떤 행동에 대한 모든 생각이 무기력 속에 굳어버리도록 둔다.

그리고 이 모두의 위 저 멀리에는, 맑고 푸르른 하늘처럼, 삶의 경악이 떠 있게 된다.(686~687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다. 어느 시대나 조금은 이상했겠지만, 요즘들어 더욱 말도 안되는 것이 현실로 나타나는, 정말, 이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군가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고, 우주의 기운을 운운하고, 혼이 비정상이 된다는 말까지 했다지만, 그 모든 것들의 이면에 이토록 경악할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아니, 이미 비정상을 말하고, 우주의 기운을 말하고, 혼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예견되었던 일인지도 모른다. 세월호 같은 거대한 재난이 있기 전에 무수히 작은 재난들이 있어, 큰 재난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무수히 작은 재난들 또한 인간들의 부주의와 안이함, 이기심 등에 의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재앙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말도 안되게 경악스러운 이 상황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을 다시 믿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이란 신뢰할 수 있는 존재인가? 나는 저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들고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떠올렸다. 그 소설은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어쩌면 저들이 그것에 조금이나마 근접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소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지금 저들을 광화문 광장으로 모이게 했는가. 그걸 알았다면 지금의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테지만. 페소아의 저 문장들은 지금의 이 시대를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근원적이고 심오하다. 이 시대는 저렇듯 심오하지도, 예술적이지도, 모순적이지도 않다. 그냥 저급하고, 황당하며, 뻔뻔하고, 경악스러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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