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허무와 망각의 단역배우

시월의숲 2016. 9. 13. 22:03

생각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다. 우리가 복잡한 단계를 거쳐서 힘들게, 우리의 피와 살이 아닌 사회적인 관련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는 것을 그들은 생명 본연의 특성으로 즉각 본능적으로 실현하기 때문이다. 동물을 닮은 자는 행복하다. 우리는 죽도록 힘들게 살지만 그들은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상의 길을 한참 돌아서 헤매지만, 그들은 집으로 곧장 가는 길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그루 나무처럼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풍경의 일부, 아름다움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임시변통의 신화일 뿐이다. 삶의 분장을 하고 살아감을 연기하는 허무와 망각의 단역배우일 뿐이다.(673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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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정말 동물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그래서 그들이 행복하고 편하게 살아가는 것인지. 집으로 곧장 가는 길을 아는 것이 과연 행복한 것인지. 그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지 않는가. 하지만 페소아의 말처럼, 그들은 곧장 집으로 가는 길을 알 것만 같고, 한 그루 나무처럼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으며, 그로 인해 풍경의 일부, 아름다움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인가? 동물을 보는 관점에 비해 인간을 바라보는 페소아의 관점은 동물의 그것보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인간은 상상의 길을 한참 돌아서 헤매며, 대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로 인해 풍경의 일부, 아름다움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인간은 임시변통의 신화이며, 삶의 분장을 하고 살아감을 연기하는 허무와 망각의 단역배우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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