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서(書)

다른 꿈의 풍경

시월의숲 2016. 12. 3. 22:38

우리가 꿈꾸는 풍경은 우리가 보았던 풍경의 안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꿈을 꾸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권태만큼이나 권태롭다.(688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봄날의책, 2014.)



*

우리가 꿈꾸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보았던 안개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꿔야 하는 걸까? 꿈꿀 수 없는 것을 꿈꾼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것은 말이 되는 말인가?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풍경이란, 너무나도 식상하고, 고리타분하며, 지루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말일까. 그렇기 때문에 페소아는 그것을 우리가 보았던 풍경의 안개라고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꿈이란 이미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정형화되었으며, 아무런 매력이 없는, 어쩌면 모두 같은 색채를 띄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지에서 강박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꿈을 본다. 그들이 찍는 사진 속의 풍경 너머에 있는 세속적인 꿈이란, 우리는 바로 이곳에 왔었고, 우리는 이 순간 정말로 행복하며, 타인들의 눈에도 반드시 그렇게 보여야 한다고 믿게 하고픈, 실제로 그 풍경이 어떠한지, 그 속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과 바람의 냄새, 빛과 그림자의 춤 같은 것은 느낄 새도 없이, 그저 사진을 위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꿈. 어쩌면 그것이 풍경의 안개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런 꿈, 세상을 바라보는 권태만큼이나 권태로운, 그런 꿈 말고, 나는 다른 꿈을 꾸고 싶다. 다른 풍경을 꿈꾸고 싶다. 흐릿한 안개 속의 풍경이 아니라, 또렷하고 손에 잡힐듯 생생하며, 꿈틀거리는 예감으로 충만한 꿈의 풍경을. 누군가의 눈에 비친 꿈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감각하는 꿈, 바로 그것을.


'불안의서(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응시  (0) 2016.12.25
꿈의 개론  (0) 2016.12.12
삶의 경악  (0) 2016.11.06
오늘의 나, 내일의 존재  (0) 2016.10.07
허무와 망각의 단역배우  (0) 2016.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