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2017년 설이 지나가다

시월의숲 2017. 2. 9. 20:41

설이 지나갔다. 올해의 설은 예년에 비해 정신적으로는 여유롭지만 육체적으로는 조금 힘겹게 보냈다. 그렇다고 육체적인 힘듦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고, 적당히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정도였기에 올해는 아주 평온하게 지나간 듯하다. 그 이유는 물론 큰아버지댁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 번 큰집에서 자고 올 뿐인데 왜 그렇게 체한 듯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 없는 억눌림을 느껴야 했는지, 왜 그렇게 불편한 시간을 보내다 와야 했는지 늘 의아해하면서도, 어떤 의무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녀와야 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올해는 큰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이런 내 마음을 큰아버지, 큰어머니가 안다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뭐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어쨌거나 이번 설에는 큰집에 가지 않고 고향집에서 아버지와 동생 내외, 고모와 사촌 동생들과 함께 지냈다. 제사를 지내는 대신 마트에서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었다. 요리 전담은 나였는데, 며칠 전부터 설에 먹을 음식 리스트를 뽑고 그에 맞는 재료를 사서 직접 요리를 한 것이다. 부추전을 부치고 불고기토마토샐러드와 청경채두부볶음을 만들었다. 고모가 택배로 보내온 전라도산 석화를 쪄서 먹고 아버지가 가져온 대게를 함께 먹었다. 요리는 즐거웠고, 내가 한 요리를 잘 먹어 준 식구들에게는 고마웠다. 음식은 다양하고 풍성했으며, 그만큼 우리는 많이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가벼운 안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해서, 정치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사촌동생이 학점을 평균 4.5점 맞았다는 이야기, 장래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하다가, 결국은 건강 이야기로 흘러갔다. 얼마 전 고모가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몸 여기저기에 혹이 생겼다고 해서 다시 재검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우리는 모두 걱정스런 목소리로 건강이 최고라는 말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떡국을 챙겨먹고 회룡포를 가서 뿅뿅다리를 한 번 건너고 순대국밥을 먹고 헤어졌다. 연휴라서 그런지 우리가 처음 가려고 했던 순대국밥집은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포기하고,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가게에 들어가 국밥을 먹었다. 맛의 차이는 조금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설 연휴가 지나갔다. 올해 설이 예년에 비해 정신적으로는 여유롭다고 한 이유는 큰집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며, 육체적으로 힘들다고 한 이유는 연휴 동안 내가 계속 요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육체적인 힘듦은 정신적인 여유에 비할 바가 못 되었고, 오히려 약간의 힘듦이 나를 더욱 뿌듯하게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요리하는 사람의 기쁨을 조금 알게 된 그런 설이었다고 할까. 물론 명절 스트레스 때문에 허리가 휘어지는 주부들에게는 좀 얄미운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2017.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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