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먼 북소리

시월의숲 2017. 2. 16. 21:02

일어나 보니 반나절이 지나가 있었다. 12시 넘어 일어나서 식빵에 계란물을 입혀 토스트를 해 먹고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책을 읽었다.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고 있는데, 여행 에세이라서 그런지 불현듯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핸드폰에 저장된 몇 달 전 일본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들춰보았다. 흔히들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남는 건 사진이지만 사진은 결코 그때의 기분과 느낌을 온전히 전달해주지 못한다. 남는 건 결국 어떤 기억 혹은 느낌인데, 그건 사진만으로 불러오기에는 뭔가 좀 부족하다. 물론 사진을 봄으로써 어떤 기억을 환기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좀 더 복잡 미묘한 상황이나 느낌은 어쩌면 글로 써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사진과 글은 상호보완적인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써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일지도(제발트의 소설에서처럼 글과 사진이 거의 동등한 의미를 띠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을 다시 가보는 것도 좋겠지만, 꼭 일본이 아니더라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이라면 어디든지 좋을 것이다. 요즘은 여행에의 욕구가 나를 자극한다. 나를 둘러싼 것들로부터 훌쩍 벗어나고 싶기 때문일까. 아니면,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건지 자꾸만 의문이 들기 때문일까. 하루키는 자신이 로마와 그리스로 긴 여행을 떠나는 이유를 먼 북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라는, 하루키 특유의 감성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자신이 곧 마흔이 된다는 것, 그래서 정신적인 탈바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것,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나는 어쩐지 그 이유 - 마흔이 되려 한다는 것 - 이 그의 여행의 가장 큰 이유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은 나 또한 곧 마흔이 될 것이며, 나도 하루키가 말했던 것처럼 일생생활에 얽매여서 그냥 속절없이 나이만 먹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하루키처럼 마흔이 되기 전에 무언가 보람 있는 일, 이제 더 이상 이런 종류의 소설은 쓰지 않을 것이다(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할 만한 작품을 써놓고 싶은욕구 같은 것은 없다. 나는 작가도 뭣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있다. 그건 아마도 많든 적든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그 두려움이 자꾸만 커져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처럼 몇 년 동안을 해외에 체류한다는 건 내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다름없다. 내가 직업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나 여행전문가(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돈을 어떻게 버는 걸까?) 혹은 프리랜서가 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며, 그러자면 일단 전업 작가나 여행전문가가 먼저 되어야 하는데 그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꿈꾸는 일이며, 꿈을 꾸다 보면 우연히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그렇게 되기를 계속 꿈꾸는 수밖에는 없다. 나는 우연이 삶을 바꾼다고 믿으며, 그런 우연은 우연하지 않은 경로로(필연이라고 하지는 않겠다) 나타난다고 믿는다.

 

늦은 오후가 되자 집에 있기 무료해져서 산책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날씨는 무척 온화해서 겨울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겨울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봄이 오는 걸까? 나는 성급하게 봄을 예감하면서 길을 걸었다. 하늘은 흐렸지만 공기는 상쾌해서 모든 사물이 말쑥하게 씻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길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고, 산책을 위해 접어든 냇가에는 더더욱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간혹 사람들이 보이면 뭔가 어색한 사이처럼 서로 쭈뼛거리며 지나갔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몸집이 제법 큰 소년이 옆에 같이 가고 있는 여자아이에게 무어라 욕을 하면서 지나갔고, 그 옆 공터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큰 소리로 웃으며 연날리기를 했다. 나는 냇가를 지나 남산 쪽으로 코스를 잡고 걸었다. 남산에 올라 좀 걷다가 의자에 앉아 가져 간 책을 읽었다. 그곳에서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고 있으니 정말 어딘가에서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굳어버린 몸 어딘가의 작동 스위치를 켜는 듯한, 몸속 저 깊은 곳의 어떤 꿈틀거림을 자극하는 듯한 북소리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목욕이 몹시 하고 싶었다. 뜨거운 물에 온몸을 푹 담가 본 지가 언제였던가? 북소리와 목욕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내게는 그것이 마치 그럴 수밖에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무릎을 때리면 발이 올라오고, 음식을 보면 침이 고이는 것처럼. 나는 서둘러 남산을 내려오면서 <먼 북소리>의 앞부분, 하루키가 왜 긴 여행을 떠났는지 밝히는 부분을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얄미운 고백이지만, 뭐 그게 또 하루키의 매력이라면 매력일 테니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것만큼 내면의 충동을 잘 표현할 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어 졌다는 것 외에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그의 말대로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 아닐는지.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 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어떤 일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딘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17)”(2017.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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