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 문학동네, 2003.

시월의숲 2017. 8. 13. 16:53

 

 

나는 이미 오래전에 그 책을 읽었으나, 이번에는 그것의 '재발견'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아니, 재발견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나는 언제나 그 책을 생각하고 있었고, 늘 다시 한 번 더 읽으리라 다짐하고 있었으므로, 기억속에서 잊혀지거나 그저 스쳐지나갔던 것에 불과했던 것을 새삼 발견했다는 의미에서 재발견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그 책에 대해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지속적인 관심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거나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발견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발견이라 부르고 싶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음으로써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했고, 그것은 당연하게도 지금 내가 이 책을 읽음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후에 내가 다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때는 또다시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당시 인상적이었던 문장을 발췌해서 블로그에 올렸었고, 나름의 감상문도 함께 올렸었다.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고 예전에 올려놓은 글을 읽어보니, 그것은 내가 쓴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생경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물론 밑줄을 그어놓은 문장들은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당시 내가 시큰둥하거나 크게 인상적으로 느끼지 못했던 문장들이 이번에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그때와는 달리 마음의 혼란을 겪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나는 사랑에 대한 시니컬한 묘사와 소설과 에세이를 넘나드는 듯한 독특한 유형의 글에 대한 작가의 말(당시만 해도 상당히 새롭고 신선하게 다가왔던)을 발췌해서 실었는데, 지금은 그보다는 소유욕에 대한 절절한 의문과 음악으로 표상되는 어떤 상징 혹은 정신이 마음에 더 남았다. 생각해보면 처음 나는 이 책을 상당히 피상적으로 읽은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깊이, 한발짝 더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나는 이 책을 단순히 자유에 대해서, 음악으로 표상되는, 언어를 뛰어넘는 어떤 절대정신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는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그보다는 그런 세계를 지향하는 자의 좌절에 더욱 주목했다. 그러니까 독일어 선생이던 M으로부터 M과 에리히와의 관계 - 단순히 혹기심만으로 육체적 관계를 가졌다는 말 - 을 듣고 난 후 화자가 느꼈던 수치심과 소유욕에 대한 격렬한 반응 말이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통렬하게 부르짖는다.

 

나를 깊게 관통했던 것은 소유욕이란 무엇일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며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인가. 아름다움, 섬세함, 배려와 관용, 은둔된 평화, 글을 읽고, 음악과 함께 그리고 쓴다…… 그러면서 마침내 찾아낸 영혼의 일치, 그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배반하고 파괴해버릴 만큼 그것은 정당한 것인가. 인간은 왜 소유욕을 가지며 그것이 충족되지 못할 때 짐승처럼 분노하는 것일까. 그 분노가 수천 가지의 음 중에서 긴 시간 동안의 고뇌 끝에 얻어진 단 하나의 극치의 선율, 그 선율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고 도저히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짓밟고 모욕하며 천박한 표현으로 스스로를 저주하고 미친 닭처럼 제 살을 쥐어뜯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왜 인간은 그대로 방관할 수밖에 없는가. 왜 인간은 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소유욕은 어디에서 오는가. 왜 그것은 마음속의 긴 여정의 사색에서 얻은 모든 윤리적인 질문들을 침을 뱉고 조롱하는가.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그런 것을 통제하지 못하면서 인간이 이루어내는 다른 일들이 과연 가치를 평가받을 만한 자격이라도 있단 말인가.…나는 자신을 위한 한마디의 위안이나 변명의 말도 찾지 못했다. M의 몸짓 하나, M의 그림자 하나, M의 목소리 하나까지도 독점하고 싶은 갈증에 시달릴 때, 사랑은 곧 지옥이 될 것이다. M은 그런 식으로 나에게 고통을 줄 수 있었다. M은, M은 마침내 그것을 발견한 것이다.(132~133쪽)

 

그리고는 이런 결론에 이른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혹은 M을 위해서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현악기 연주를 했어야만 했었다. 만일 우리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음악으로만 대화를 나누었다면, 나는 M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거나 혹은 그 반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M에게서 완전히 놓여나든지 아니면 M을 완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알기 위해서 사용한 언어는 단지 방언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표현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M과 나를 모방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어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우리의 관계에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니었고 M은 점점 M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가 음악으로만 대화했다면 일은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몰랐다. 음악은, 그것이 무엇에 바쳐졌건 개의치 않는다. 음악의 가치는 결코, 대왕의 이름으로도, 지불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을 한없이 용서하면서 동시에 무시하고 능가한다. 음악은 불만과 결핍과 갈증으로 가득한 인간의 내부에서 나왔으나 동시에 인간의 외부에서 인간을 응시한다. 혹은 인간의 너머를 응시한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스스로 응시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현. 언어와 음악은 그렇게 공통적이다. 그러나 음악은 전부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입을 다문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점차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 인간은 단지 '나는 음악을 듣는다'라고 서술할 수 있을 뿐이다. 나를 사로잡을 무렵, M이 나에게 말한 대로,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144~145쪽)

 

책의 뒷표지에 실린 조경란의 말처럼,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언어'에 관한 산문이며 그것은 곧'사랑'에 관한 소설이라는데 동의하지만, 언어와 사랑을 뛰어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갈망을 언어로 표현해 낸 것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작가는 언어로써 무언가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들이고, 그로부터 오는 좌절감마저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글을 쓰면서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으므로 더이상의 사교는 필요치 않는, 더이상 자신을 자극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 - 고립은, 그래서 필수불가결하고 의도치는 않았으나 자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은 매우 당연한듯 보이면서도 무척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책상 앞에서 나는 계속해서 쓴다. 페터 한트케의 말처럼,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듯이 느낀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174쪽)